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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블 May 04. 2021

엄마가 멀리 떠난다는 신호, 혹은…

사골국

엄마가 사골국을 끓이기 시작하면 일단 두렵다. 엄마가 멀리 떠난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부재는 적어도 중고등학생은 돼야 긍정신호지, 초등학교 때는 마냥 좋은 일이 아니다. 엄마가 없는 밤은 무섭다.


엄마가 어딜 가지 않는데도 사골국을 끓인다? 이건 더 안 좋은 신호다. 최소 일주일은 삼시세끼 같은 메뉴 확정이다. 우리 엄마는 사골국을 끓이면 사골이라는 존재가 더이상 확인되지 않을 때까지 끓여서 그걸 내내 먹였다. 그때는 사골국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좋아하지도 않은 음식을 일주일 내내 먹으려니 그렇게 힘들 수가 없다.


요즘에야 사골은 2~3번 끓이는 게 가장 좋고, 오래 끓이면 안 좋은 성분이 나온다는 게 잘 알려져 있지만 20~30년 전만 해도 귀한 한우 사골은 그저 우리 가족을 건강하게 만들어줄 비싸고 귀한 음식이었다. 몇 번이고 고아서 우리 가족들의 뼈와 살이 되도록 해야지.


몇 번을 우린 데다가 간도 따로 안 해서 맛은 밍밍하기만 하다. 여기에 대파만 한 움큼 넣고나면 이건 그냥 파국(중의적 표현 노렸다)이 된다. 그땐 그렇게 지겨운 음식이었는데 요즘엔 그 맛이 종종 떠오른다. 엄마는 1년에 한두번 정도 사골을 끓여주곤 했는데 사골은 종종 섭취해줘야 음식으로 잠재적으로 내재된 듯하다.


밖에서 먹는 사골국은 왠지 모르게 신뢰가 가지 않는다. 분유를 타넣은 듯 뽀얀 국물색이 뭔가 인위적인 느낌이다. 내가 집에서 먹었던 곰국은 엄마가 물을 넣고 너무 많이 고아서 지나치게 맑았던 것 같지만 이미 ‘사골국=맑은 국’이라는 인식이 박혀있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다.


유명하다는 곰국집, 설렁탕집을 몇 군데 들렸다가 마음에 쏙 드는 곳을 못 찾자 아주 무모한 도전을 시작했다. 내가 끓이자.


너무 많은 양은 부담스러워서 일단 사골 2.5kg에 잡뼈 2.5kg을 배달시켰다. 블로그에는 5kg씩 넣는 경우가 많아 가볍게 시작하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배달 온 물건이 이상하다. 2.5kg이 왜 이렇게 많은 건데? 왜 냄비에 다 안 들어가는 건데?


순간 고민을 한다. 뼈를 그대로 엄마네 갖다줄 것인가, 곰솥을 살 것인가. 답은 정해져 있다. 곰솥을 사야지. 일이 점점 커지고 있는 느낌이 강하게 들지만 이미 강을 건넜다.


예쁜 잼팟이 6L다. 뼈가 총 5kg이니까 충분하고도 남을 것 같다. 역시 오판이다. 하나도 안 충분하다. 큼직하게 썰린 사골은 한 팩도 제대로 안 들어간다. 결국 15L짜리 곰솥까지 구비하고 나서 본격적인 사골국 끓이기에 돌입했다. 처음 끓이는 것이기도 하고, 이렇게까지 했는데 여기서 실패하면 분노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유튜브와 블로그를 100개는 족히 본 듯하다.


물에 담가 피를 빼는 데만 한나절은 걸렸다. 과정을 거칠수록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지만, 일단 시작했으니 끝은 봐야 한다. 뼈를 세 번 우려 그 물을 모두 섞으면 완성된다고 하니 이젠 가스불이 다 해주겠지, 라고 생각한다면 역시 잘못됐다.


뼈를 초벌삶기한 후 본격적인 사골국 만들기에 돌입했다. 6시간 정도 끓이고 나면 물이 확 줄어드는 게 보인다. 뼈를 하나씩 빼고 곰솥에 있는 국을 우리집에 있는 가장 커다란 냄비에 붓는다. 어? 왜 넘치려는 건데!


당황하지 않고 첫 번째 끓인 국을 두 개의 냄비에 나눠 담고 뼈와 들통을 씻은 뒤 다시 두 번째 사골국 끓이기에 들어간다. 혹시라도 물이 부족할까, 불이 잘못될까 싶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두 번째 냄비도 서너시간 끓인 뒤 국을 옮기려는데 이것도 국이 많다. 안 되겠다. 두시간 더 끓이자.


세 번까지 이렇게 끓이니 사골국은 (의도치 않게) 진액만 농축됐다. 냉장고에 넣고 국을 식히면 기름이 살짝 굳게 되는데 그걸 걷어내고 세 번 끓인 국을 섞으면 끝이다. 젤라틴처럼 탱글탱글한 사골국은 불에 가열하면 그럴듯하게 완성된다.


이틀은 꼬박 여기에만 정신을 쏟아야 하니 여간 정성이 많이 들어간 음식이 아니다. 이마저도 그저 국이 완성됐을 뿐 부엌은 누가 봐도 전쟁터다. 싱크대는 소기름에 미끌거렸고 집에 있는 냄비란 냄비는 다 나와 있었다. 치울 생각을 하니 한숨부터 나온다.


엄마가 왜 몇날며칠을 사골국만 올렸는지 알 것 같다. 이건 식구들이 정말 질릴 때까지 먹어줘야 하는 음식이다. 웬만한 정성과 애정 없이는 절대 만들 수 없는데 한 번 먹고 냉장고에 넣을 순 없다. 그간의 엄마 정성을 내가 너무 몰라줬던 것 같아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말 그대로 ‘개고생’을 해가며 만든 사골국은 나와 남편이 두어번 먹고, 엄마네 집에 두어번 먹을 분량을 갖다 주니 냄비가 금방 바닥을 보였다. 블로그에는 남은 국물을 얼려 비상식으로 먹거나 육수로 활용하라는데 얼릴 게 없었다.


그래도 내 48시간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국을 먹은 남편과 엄마 아빠는 연신 맛있다고 엄지를 치켜세워준다. 쌀쌀해진 날씨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마음이 든든해졌으면 그걸로 됐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이런 마음으로 우리 가족을 위해 사골국을 끓인 거였구나. 엄마의 마음도 조금 알게 됐다.


하지만 사골국을 끓이는 경험은 한 번으로 충분한 것 같다. 맛있는 곰탕집을 다시 찾아봐야겠다.


+) 몇 달 지나지 않아 이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한 번 만들어보니 꽤 자신감이 붙었고, 무엇보다 맛있게 먹어주는 가족들을 생각하니 안 끓일 수가 없었다. 나 스스로도 내가 만든 사골국이 밖에서 사먹는 것보다 맛있었다.


그리고 뼈를 초벌로 삶으면서 생각했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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