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엄마 입장에선 '혁명'이나 다름없는 일이 생겼다. 그 해부터 우리 학교에서도 급식을 시작한 것이다. 엄마는 가정통신문을 보며 “정말 잘 됐다”며 환하게 웃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잘 된 건지, 엄마가 잘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3학년이 된 첫날부터 오후 수업이 시작되면서 급식을 먹게 됐다. 3학년 2반이었던 우리반 학부모들은 3월3일이 급식 당번날이었다. 급식실에는 남산만큼 배가 나온 엄마가 하얀 모자와 하얀 옷을 입고 첫째딸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막냇동생이 태어나기 보름 전이었다.
새롭게 맞은 학기 이튿날. 선생님도, 친구들도 낯선 그때 내 눈 앞에 나타난 엄마의 모습은 내가 그 해를 잘 버티게 해 준 원동력이 됐을지도 모른다. 항상 적응이 조금 느린 내가 자신감을 갖고 시작한 새학기였던 기억이 또렷하다.
전 학년의 급식배급을 모두 마치고 엄마는 담임선생님께 “다음에는 못 올 것 같다”며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3학년 1반부터 6학년 13반까지 순서대로 급식당번을 하던 때였다. 지금에야 학교일에 부모님을 부르면 서로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그때는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날, 그때를 떠올릴 때면 엄마에게 한없이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내 마음도 왠지 모르게 풍요로워진다.
그렇게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쭉 이 시스템이 유지됐지만 때때로 도시락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급식실에서 파업을 할 때는 대충 며칠 빵이나 라면으로 때우면 됐지만 방학 자율학습 때는 두 달 가까운 기간 동안 두 끼를 매번 사먹을 수 없었다. 급식이 맛이 없다며 우리끼리 의기투합해서는 결국 엄마들을 괴롭혀 도시락을 싸다니기도 했다.
도시락은 처음 며칠은 좋다. 대량급식이 아니라 엄마의 사랑과 정성이 묻어있는 집밥이다. 일주일 내내 먹은 멸치볶음이 오늘 도시락에 담겨있을 때도 많았고 어제 저녁에 먹던 김치볶음이 오늘 아침밥상에도, 점심 도시락에도 들어있을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도시락을 먹는 시간이 즐거웠던 건 꼭 근사하고 맛있는 반찬이 아니어도 도시락 서너개만 모으면 뷔페 부럽지 않은 한끼가 완성됐기 때문이리라. 도시락을 몇 번 먹고 나니 빈 사물함에는 커다란 양푼과 고추장, 참기름이 자리 잡았다. 도시락들마다 나물이 집중적으로 많은 날에는 그 양푼이 요긴하게 쓰여 비빔밥을 슥슥, 비벼먹었다.
물론 맛있는 반찬이 있는 날은 예외다. LA갈비는 누구네 집에서도 아주 귀한 반찬이다. 다 식어서 딱딱하게 굳었지만 일단 도시락 뚜껑을 연 순간부터 시선이 집중됐다. 엄마가 소시지를 볶아주기라도 하면 친구들은 우르르 달라붙어 하나씩 가져가 버리고 정작 나는 케첩이나 쪽쪽 빨아먹었지만, 그마저도 뭐가 좋은지 깔깔대던 때였다.
엄마는 이렇게 튼튼하고 커다란 딸이 혹여라도 체할까 싶어 항상 국을 보온통 한가득 담아주었다. 많다고 투정을 부리려치면 친구들과 나눠 먹으라며 종이컵도 몇 개 쥐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때는 한창 바로 옆 동에 살던 친구와 잠잘 때 빼고는 거의 붙어지내다시피 했는데 집안 사정으로 도시락을 챙겨다닐 수 없었다. 그때 그 친구는 주로 수저통만 들고 다녔던 것 같다.
집에 와서 이 얘기를 엄마한테 했더니 엄마는 다음날부터 도시락통을 2개 내밀었다. 내가 평소에 들고 다니던 것과 똑같은 제품이었다. 반찬과 밥과 국이 누구 하나 섭섭하지 않게 똑같은 모양으로 같은 양이 담겨있었다. 밥 위에 항상 올라가던 계란프라이도 하나씩 올라가 있었다. 엄마는 그렇게 내 친구의 도시락을 1년 넘게 싸주었다. 우리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엄마는 친구에게 베푸는 법,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법을 그렇게 알려주었다. ‘친구와 친하게 지내라’,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을 아끼지 말아라’ 하는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아갔다.
딸들의 친구도 마치 딸처럼 대해주었다. 딸과 잘 놀아주는 친구가 고맙다며, 혹여라도 딸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고민 없이 들어줄 수 있는 친구를 수없이 만들어주었다. 누구네 엄마처럼 제 자식만 감싸는 게 아니라 내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나를 다그치고 꼭 사과하도록 했다. 그게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감사한 일과 미안한 일은 꼭 표현하라고. 덕분에 내가 지금, 이정도라도 사람 구실을 하고 사는 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