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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블 May 28. 2021

엄마와 나만 아는 맛의 기억

메밀국수

나는 엄마의 첫 번째 자식이라는 이유로 동생들보다 꽤 많은 걸 누리며 살았다. 엄마의 가장 큰 사랑을 2년 넘게 독차지했고, 엄마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덕분에 가장 많은 추억을 갖고 있다.


그중 하나가 엄마와의 데이트다. 아빠는 물론이고 동생도 모르는 비밀데이트. 엄마는 남편이나 또 다른 자식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나와 잦은 데이트를 즐겼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부지런히 약속한 장소로 향하면 엄마는 혹여라도 딸이 당신을 못 보고 지나칠까 싶어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다. 그리고는 이내 딸을 발견하고 가장 환한 웃음으로 나를 맞아준다.


한쪽 손에 오늘 저녁거리를 잔뜩 든 엄마는 다른 한 손으로 딸의 손을 꼭 잡고 걷는다. 엄마보다 한 뼘은 더 큰 딸이 여전히 세살 꼬마로 보이는 듯하다. 길이라도 잃을까 염려하는 듯 손에 땀이 나게 꼭 쥔 손에서 사랑이 느껴진다.


데이트 코스에는 두세번에 한번꼴로 맛있는 걸 먹는 시간이 있었다. 동네 새로 생긴 떡볶이집이나 꽈배기를 파는 포장마차는 기본이고 잔뜩 찬거리를 사놓고는 둘이서만 돼지갈비집에 몰래 다녀오기도 했다. 물론 아빠와 동생에게는 비밀로 하고.


그중 단연 최고는 메밀국수집이다. 처음으로 먹어본 메밀국수였다. 오며가며 간판을 보긴 했지만 들어가볼 생각도 하지 못했던 곳이다. 뜨거운 여름날 시원한 국수가 먹고 싶었던 걸까. 엄마는 머뭇거리리는 나를 끌다시피하며 문을 열었다.


딸랑.


종소리와 함께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이 내 뺨을 건드렸다. 나도 모르게 빨려들어가는 기분이다. 엄마는 판메밀 2개를 시키고는 발갛게 익은 얼굴을 천천히 식혔다.


엄마의 자연스러운 모습은 거기까지였다. 판메밀은 엄마도 처음 먹어보는지 벽에 붙은 설명서를 보며 무즙이며 대파를 넣고 와사비와 김가루를 넣어가며 어색한 젓가락질을 했다. 메밀국수라는 걸 처음 먹어보는 나는 엄마의 행동을 따라하기 바쁘다.


국수가 입으로 들어갔는지 코로 들어갔는지 모르게 먹었던 것 같다. 시원했던 기억만 어렴풋이 기억의 조각으로 남아있다. 국수가 낯설었는지 사이드메뉴로 함께 팔았던 만두를 더 맛있게 먹었던 것도 같다.


그래도 지금은 꽤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찌는 듯한 더위에 동료들과 함께 메밀국수집으로 향하면 맛도, 색도 없이 옛날 만화책을 보듯 빛바랜 장면 하나하나가 떠올랐다 사라진다.


이런 기억의 파편이 내 인생의 자양분이 되어 내가 모르는 시간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번달이 지나면 본격적인 더위가 찾아온다는데 더 더워지기 전에 메밀국수집을 한번 가봐야겠다. 북적북적한 광화문 ‘그집’ 대신 엄마와 함께 갔던 ‘그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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