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M May 25. 2021

[반항의 대중음악가] 밥 말리②

자메이카의 화합을 이끈 레게 음악의 대부

  <Simmer Down>의 히트로 말리와 웨일러즈의 앞날은 밝을 것으로 보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 스튜디오 원 소속이었던 웨일러즈 멤버들은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해 불만이 쌓여갔다. 그들은 스튜디오 원과 제대로 된 계약서도 작성하지 않았고, 심지어 출연료를 받지 못할 때도 있었다. 말리는 다른 멤버들에 비해 비교적 온건한 입장이었지만 그렇다고 스튜디오 원 편에 설 수도 없었다. 멤버들과 회사를 중재하는 것도 말리의 몫이었다. 

  웨일러즈는 1965년 첫 앨범 《The Wailing Wailers》를 통해 자메이카 내에서 상당한 인기를 얻었지만 여전히 빈털터리 신세였다. 폭발한 웨일러즈는 결국 스튜디오 원에서 나와 미국으로 향했다. 어떻게든 미국에서 돈을 모아 음반회사를 차리겠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그들은 청소, 주차장 안내, 접시 닦기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돈을 버는 한편 틈틈이 작곡을 하며 음악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 시기 말리는 라스타파리교에 빠져 있었다. 라스타파리교는 하일레 셀라시에 에티오피아 황제가 흑인을 구원해줄 것으로 믿는 종교였다. 결과적으로 셀라시에 황제가 흑인을 구원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억압된 삶을 살아온 흑인들에게는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당시 자메이카 정부는 라스타파리교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무자비한 탄압 정책을 펼쳤다. 이에 라스타파리교를 믿는 자메이카 음악가들은 사회비판적인 가사와 느린 템포의 곡으로 답했다. 말리도 그 중 한명이었다. 

  자메이카로 돌아온 웨일러즈 멤버들은 웨일링 소울 레코드라는 회사를 차려 직접 싱글을 발매했지만 경험이 없는 그들에게 회사 경영은 무리였다. 방송국들마저 웨일러즈를 외면하는 나날이 계속됐고, 결국 웨일링 소울 레코드는 1967년 말 조용히 문을 닫았다. 이후 웨일러즈는 레게 음악을 시도하며 영국에도 진출했지만 눈에 띌만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이렇게 웨일러즈는 반짝 인기로 사라지는 듯했다. 

  음악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은 웨일러즈는 영국을 오가며 음반 제작과 공연에 공을 들였다. 또 새로운 음반사들의 요구로 그룹 이름을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즈로 변경했다. 그 결과 1970년대부터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즈의 인기는 다시금 높아졌고, 《Soul Rebels》 《Soul Revolution》 등 꽤 괜찮은 앨범도 발매할 수 있었다. 

 
 

  1972년, 총선거를 앞두고 자메이카 사회는 들썩이기 시작했다. 인민국가당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말리는 마이클 만리 인민국가당 당대표의 팬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만리는 셀라시에 황제의 자메이카 방문을 주선했고, 셀라시아 황제는 만리에게 지팡이를 선물한 적이 있었기에 라스타파리교 신도들이 만리를 지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메이카 음악가들은 각자의 정치적 견해가 있었겠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상 직접적으로 선거 운동에 참여하기는 어려웠다. 말리 역시 처음에는 선거 운동 참여를 망설였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이내 만리를 공식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자메이카는 다수당의 당대표가 국가 수상으로 취임하는 구조이므로 인민국가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면 만리는 수상이 될 수 있었다. 만리도 말리의 유명세를 적극 활용해 선거 유세에 두 사람이 같이 다니곤 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노동당이 이를 보고만 있을 리가 없었다. 인민국가당을 지지하는 노래를 방송에서 금지시키는 등 언론 통제를 하기에 이르렀다. 말리는 자메이카 공연이 어렵다면 해외 공연을 통해 자메이카의 현실을 알리려 했다. 이 시기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즈는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새로운 팬을 만들었고, 말리와 자메이카에 대한 관심도 세계적으로 높아졌다. 문제는 다른 멤버들과 말리의 갈등이었다. 만리를 지지하는 마음은 같았지만 해외 공연에 대해서는 말리처럼 적극적이지 않았다. 특히 버니 웨일러는 영국 음식에 적응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그룹이 말리 위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나왔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갈등이 수면위로 올라오지는 않아 그런대로 공연을 진행할 수 있었다. 

  말리의 노력 덕이었을까. 1972년 자메이카 총선에서 인민국가당은 37석을 확보해 16석을 확보한 노동당에 승리했다. 동시에 만리도 자메이카 수상에 취임해 새로운 자메이카에 대한 자메이카인들의 기대감도 커졌다. 한편 패배한 노동당은 매일 같이 만리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만리도 본인의 뜻을 위해 강경하게 대응했다. 각 당이 고용한 폭력배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는가 하면 만리는 오후 6시 이후 외출을 금지하는 야간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정권은 바뀌었지만 자메이카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반항의 대중음악가] 밥 말리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