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M May 27. 2021

[반항의 대중음악가] 밥 말리④

자메이카의 화합을 이끈 레게 음악의 대부

  1976년 초반부터 자메이카에는 긴장감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1976년 12월 20일 자메이카 총선거가 진행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정권 교체를 시도하는 노동당과 정권 유지를 원하는 인민국가당은 정치가 아니라 조직폭력배의 세력다툼을 방불케 했다. 정치깡패가 돌아다니는 것은 뉴스거리도 되지 못했다. 한국에서도 과거 정치깡패가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정치깡패는 군부 정권에 의해 대다수 정리됐다.

  선거를 앞둔 노동당 입장에서 말리의 존재는 성가셨을 듯하다. 말리는 단순 인민국가당 지지자가 아니라 젊은이들을 모으는 힘이 있었다. 또 국제 공연도 자주 다니면서 우호적인 해외 여론까지 이끌 수 있는 인물이었다. 자메이카 근처에는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있었기에 국제 여론은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노동당은 말리를 회유하려고도 했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말리는 1976년 12월 5일 자메이카 킹스턴에서 『Smile Jamaica』 공연을 열기로 결정했다. 자메이카 국민들을 위한 무료 공연이었고, 딱히 정치적 목적은 없었다. 하지만 선거가 5일 남은 상황에서 만리 수상은 말리의 공연이 선거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해 알게 모르게 정부 차원에서 공연을 지원했다. 이 소식을 들은 말리는 본인의 진실성이 왜곡될 수 있다는 우려에 실망감을 표현한 것으로 전해진다.

  노동당은 노동당대로 공연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정치적 목적이 없는 공연이라지만 말리가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자체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더구나 인민국가당 지지자인 웨일러와 토시까지 공연 무대에 오르기로 했다. 당시 말리는 공연을 중단하라는 협박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노동당 측에서 협박 전화를 했다고 볼 증거는 없었지만 말리는 노동당의 행동이라고 확신했다.

  공연 이틀 전인 12월 3일, 결국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이날 말리는 여느 때처럼 연습을 하다가 아내 리타 말리와 매니저 돈 테일러와 잠시 쉬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괴한이 나타나 총을 쏴댔고, 연습실 부엌 유리창은 산산조각이 났다. 총 소리가 들리자 몸을 숙이고 납작 엎드렸지만 말리와 테일러는 부상을 입고 말았다. 총성이 잠시 멈추자 리타 말리는 주변을 살필 겸 뒷문으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이를 본 괴한의 총에 맞고 말았다. 다행히 세 사람 모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공연은커녕 정상적인 생활도 어려웠다.

  만리 수상은 이런 말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병문안을 와서 공연 강행을 부탁했다. 만리 수상뿐 아니라 장관들도 공연장에서 말리를 기다렸다. 말리를 공연장으로 이끈 것은 만리 수상이나 정치인들이 아니라 그를 기다리는 팬들이었다. 공연 당일날도 말리는 마음을 정하지 못했지만 5만 명 이상의 관객이 공연장에 기다리는 소식을 듣고 말리는 공연을 결심했다. 그는 공연을 진행하면서 “정치적인 이유가 절대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공연 이후 인민국가당이 선거에서도 승리했고, 만리 수상도 연임에 성공했다.

  이후 말리는 미국에 머물며 휴식을 취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말리의 발에서 암세포가 발견됐기 때문에 음악 활동을 계속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이전과 같은 활발한 활동은 어려웠다.

  한편 자메이카에서는 여전히 시끄러운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만리 수상이 연임했다지만 각종 범죄와 양극화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만리 수상이 범죄를 막기 위해 군대까지 동원하면서 혼란은 가중됐다. 노동당과 인민국가당 싸움에 지친 자메이카 국민들은 다시 말리를 찾기 시작했다. 인민국가당 지지자뿐 아니라 노동당 지지자들도 말리에게 연락을 취해 사태 해결을 부탁했다.

  고국 자메이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말리는 1978년 4월 22일 『One Love Peace』 공연을 열기로 결정했다. 토시도 흔쾌히 공연에 참여했다. 인민국가당을 지지하는 공연이 아니라 인민국가당과 노동당의 화해 자리를 위한 공연이었다. 공연에는 만리 수상과 에드워드 시가 노동당 당대표가 초대됐다. 시가 대표는 만리의 초청이 썩 달갑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딱히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공연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토시는 무대에서 정치인들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자메이카의 각종 문제 해결은커녕 자기 잇속만 챙긴다는 이유에서다. 당연히 만리 수상과 시가 대표 귀에는 거슬렸겠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얼마 후 이번에는 말리가 무대에 올라가 자메이카 역사에 남을 말을 외쳤다.

  “제가 언변이 좋지는 않지만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을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바랍니다. 저는 이곳 무대 위에 만리 씨와 시가 씨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그저 악수하고 사람들에게 우리가 뭉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으면 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만리 수상과 시가 대표가 무대에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무대 위에서 서로의 손을 잡았고, 말리는 그 가운데 서서 어린아이처럼 둘의 어깨를 잡고 방방 뛰었다. 혹여나 사람들이 보지 못할까 둘의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무대 위 세션들은 팔을 휘두르며 환호했다. 관객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1978년 6월, UN이 말리에게 제3세계 평화 메달을 수여하면서 말리는 흑인들의 희망과도 같은 존재가 됐다. 말리도 이에 화답하듯 아프리카인들을 위한 자선공연을 수차례 열었고, 에티오피아에 방문해 어려운 사람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1980년 4월, 짐바브웨는 독립 기념식을 맞아 말리를 초청했다. 말리가 1979년 짐바브웨 독립을 염원하는 곡 <Zimbabwe>를 발표했기 때문이었다.

  말리는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평화 운동을 하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오랜 시간 운동을 할 수는 없었다. 말리 발에 있었던 암세포는 사라졌지만 뇌에서 악성 종양이 발견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폐와 위에도 암세포가 발견되는 등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다. 말리는 방사능 치료를 받으면서 호전되나 싶었지만 오래가지 못했고, 결국 1981년 5월 11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자메이카 평화의 상징치고는 너무나도 허무하고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한편 앞서 1980년, 자메이카 총선거에서 노동당이 승리해 시가가 새로운 수상으로 취임했다. 8년 만에 이뤄진 정권교체였고, 늘 그렇듯 선거 과정은 매끄럽지 못했다. 말리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평화롭게 바꾸고 싶지만 한계가 있었다. 수상으로 취임한 시가는 말리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시가는 오랜 기간 정치적 반대 진영에서 활동했음에도 말리의 뜻과 노력은 인정한 것이다. 이처럼 말리는 사실상 내전에 가까웠던 자메이카를 건전한 정치적 형태로 바꾼 인물이다. 자메이카 현대사에서 손꼽히는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반항의 대중음악가] 밥 말리③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