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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 Jun 17. 2021

[반항의 대중음악가] 오지 오스본④

헤비메탈의 태동, 냉전 시대를 관통한 기행

  1989년 8월, 오스본에게 있어 기념비적인 공연이 열렸다. 바로 소련에서 열린 모스크바 음악 평화 축제다. 당시 동유럽 국가들은 하나 둘 붕괴하고 있었고, 독일 베를린 장벽도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냉전이 끝나가는 분위기에 맞게 미국과 소련의 유명 헤비메탈 밴드들이 한 곳에 모여 화합을 하자는 취지의 공연이었다. 축제에 참여한 미국 밴드는 오스본을 비롯해 본 조비, 스키드 로우, 신데렐라, 머틀리 크루 등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밴드들이었다. 소련 측에서는 고르키 파크, 뉘앙스, 브리가다 S 등 인기 밴드들이 참여했고, 서독의 스콜피온즈도 축제 무대에 올랐다. 

  의욕이 앞선 오스본은 자신을 공연 뒤쪽 순서에 배치해달라고 요구했다. 보통 음악 축제에서 유명한 음악가일수록 뒤에 나오고 마지막은 헤드라이너라고 해서 가장 인기 있는 음악가가 나오기 마련이다. 당시 최정상급 인기를 누렸던 본 조비가 헤드라이너를 맡는 것에는 이의가 없었지만 오스본 입장에서 머틀리 크루보다 순서가 앞이라는 점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는 공연을 불과 한 시간 앞두고 순서를 조절하지 않으면 공연을 하지 않겠다고 주최 측을 협박했다. 

  머틀리 크루 멤버들은 마약은 기본이고 음주운전에 가정폭력 등 오스본 못지않은 문제아들이었다. 오스본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줄 정도로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머틀리 크루 매니저 독 맥기의 결정으로 결국 머틀리 크루가 오스본보다 먼저 공연했다. 잡음이 있기는 했지만 오스본과 머틀리 크루는 이전에 같이 공연을 하는 등 모르는 사이도 아니었기에 다행히 큰 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다만 이 일을 계기로 맥기는 머틀리 크루 매니저에서 해고됐다.  

  우여곡절 끝에 축제가 진행됐지만 오스본은 이날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다. 다른 음악가와 달리 오스본이 무대에 올라가자 수천 명의 관객이 온갖 물건을 던져대며 그야말로 광란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스키드 로우의 베이시스트 레이첼 볼란은 2017년 9월 『Rolling Stone』과의 인터뷰에서 “관객들은 밴드가 누구 건 신경 쓰지 않고 스스로 축제를 즐겼다. 하지만 오스본은 예외였다”라고 말했다. 

 
 

 ‘모스크바 음악 평화 축제는 소련이 가진 첫 로큰롤 자유의 경험이다. (…) 축제는 젊은 소련 팬들에게 무엇이 인생을 즐겁게 만들 수 있는지 보여줬다. 미국인, 영국인, 독일인이 소련에서 첫 공연을 했다는 경험도 선사했다.’  - 2017년 9월 22일 『Rolling Stone』 

 
 

  오스본은 1996년부터 매년 오즈페스트라는 축제를 열기 시작했다. 한편 이 시기 블랙 사바스는 최악의 실적을 거두고 있었다. 1994년 발매한 앨범 《Cross Purposes》는 빌보드 차트 122위라는 굴욕적인 성적을 거뒀고, 1995년 발매한 《Forbidden》은 아예 순위에 오르지도 못했다. 과거 오스본을 내쫓은 블랙 사바스였지만 이제는 둘의 입장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오스본도 블랙 사바스에 마음이 없지 않았다. 특히 버틀러는 오스본이 무명일 때부터 함께한 사람이었다. 이런저런 이해관계가 맞으면서 1997년 오스본, 아이오미, 버틀러가 뭉쳐 원년 블랙 사바스 멤버로 돌아왔다. 다만 드러머 워드는 개인 사정으로 블랙 사바스를 탈퇴한 상태였고, 과거 오스본의 드러머였던 마이크 보딘이 새로운 블랙 사바스 드러머로 합류했다.  

  오스본의 블랙 사바스 재합류 후 첫 무대는 1997년 오즈페스트였다. 1998년에는 라이브 앨범 《Reunion》을 발매했지만 오스본이 함께한 블랙 사바스의 정규 앨범은 16년 후인 2013년에야 《13》이라는 이름으로 발매됐다. 《13》은 각종 차트를 석권했고, 빌보드 차트 1위까지 오르는 등 역대급 성적을 거뒀다. 실제 블랙 사바스 정규 앨범 중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한 건 《13》이 유일하다. 

  아쉽게도 블랙 사바스는 2017년 투어를 마지막으로 활동을 잠정 중단했다. 블랙 사바스는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블랙 사바스 1968~2017’이라고 게시했다. 아이오미의 건강 상태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지지만 사실 오스본도 솔로 활동과 블랙 사바스 활동을 병행하고 있었기에 어느 한 쪽에 집중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오스본은 2020년에도 앨범 《Ordinary Man》을 발매해 빌보드 차트 3위에 오르는 등 70대에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대중에게 알려진 오스본의 이미지는 기행 그 자체지만 그 기행은 의외의 좋은 효과를 만들었다. 소련 국민들이 오스본에 열광한 이유 역시 그의 기행 때문이었다.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오스본은 미국과 소련 국민이 동시에 열광한 몇 안 되는 음악가였다. 조금 과장해서 오스본이 평화를 외치지 않았다면 소련 붕괴가 더 늦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차가운 냉전 시대에 미국인이 소련 국민들을 열광시킨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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