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M May 19. 2021

[반항의 대중음악가] 밥 딜런②

격변하는 미국 사회, 포크 음악으로 젊은이들의 지향점 제시

  딜런은 가수이자 시인이었다. 그의 본명은 로버트 짐머만으로 밥 딜런은 시인 딜런 토마스로부터 따온 예명이었다. 언론에서는 그를 프랑스 시인 아르튀르 랭보와 비교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존 바에즈, 피터 폴 앤 메리 등 다른 포크 음악가들도 딜런과 함께 정치사회적인 가사를 썼고, 특히 바에즈는 딜런과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이들은 포크 음악이 사회운동에서 일정 역할을 할 때마다 자부심을 느꼈고, 희망찬 내일이 올 것으로 믿었다.

  실제 포크 음악이 대중들에게 미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았다. 1964년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UC버클리)는 학생들의 정치적 활동을 금지하는 학칙을 발표했다. 이에 반발한 학생들은 일명 ‘자유언론운동’이라 불리는 대대적인 집회를 시작했다. 당시 학생들은 집회 현장에서 포크 음악을 불렀다.

  셀마 몽고메리 행진에서도 포크 음악이 울려 펴졌다. 1965년 3월 7일, 흑인의 참정권을 요구하는 시위대 약 600명이 앨라배마주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 87km를 행진하려 했지만 경찰의 제재로 행진은 중간에 멈춰야만 했다. 이틀 후인 3월 9일, 약 2500명의 시위대가 다시 행진을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백인우월주의자들이 행진을 방해해 끝내 행진을 진행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위대들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3차 행진을 강행했다. 3월 21일 출발한 2만 5000여 명의 시위대는 3월 25일 몽고메리주 의사당에 입성하는 데 결국 성공했다.

  행진을 계속하던 3월 24일 밤, 시위대들은 휴식을 취하면서 작은 공연을 열었다. 이날 공연에는 피트 시거, 해리 벤라폰테, 피터 폴 앤 메리, 존 바에즈, 차드 미첼 트리오 등 포크 음악가들이 함께했다. 이밖에 토니 배넷, 프랭키 레인,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니나 시몬 등 다양한 음악가들도 참석했다.  

  이 시기 <Blowin' in the Wind>와 더불어 시위대들이 가장 많이 부른 노래는 <We Shall Overcome>이다. 본래 찬송가였던 이 곡은 1948년 피트 시거가 출판한 악보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특유의 가사 덕에 집회 장소에서는 항상 <We Shall Overcome>을 들을 수 있었다. 국내에서도 <우리 승리하리라>라는 이름으로 번안돼 1970년대 학생운동 현장에서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이처럼 포크 음악은 국가와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을 모으는 힘이 있었다.


  딜런을 향한 대중들의 관심은 뜨거웠지만 딜런의 생각이 대중들과 꼭 일치하지는 않았다. 그는 누군가의 대변인이 되기보다는 음악가이기를 원했다. 가사보다는 음악성으로 평가받기를 원했고, 음악 외적으로는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 했다. 그런 딜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1963년 12월, 좌파단체 긴급시민비상위원회(ECLC)는 시민운동에 노력한 공로로 딜런에게 톰 페인 상을 수여했다. 딜런은 상을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소감을 너무나 솔직하게 드러내 팬들에게 실망감을 안겼다.

  “저에게 더 이상 흑인과 백인, 좌파와 우파는 없습니다. 위아래만 있고 아래는 땅과 매우 가깝습니다. 저는 정치와 같은 하찮은 것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자 합니다. 그런 것으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일반인들이 언제 상처를 입는지 생각합니다. 저는 ECLC로부터 톰 페인 상을 받고 싶었습니다. 저는 제 이름을 상에 새기고 싶었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흑인 집단 등 다른 집단의 이름을 새기지도 않았습니다”

 
 

  음악적 욕구가 강했던 딜런은 대변인의 역할보다 음악 창작이 우선이었다. 1964년 8월 딜런이 비틀즈를 만나면서 그의 음악적 욕구는 더 강해졌다. 비틀즈가 딜런의 가사를 보고 감탄했다면 딜런은 비틀즈의 음악성과 연주에 감탄했다. 더 이상 대중을 의식하지 않고 본인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현실적으로 어쿠스틱 기타와 하모니카로 보여줄 수 있는 음악에도 한계가 있었다.

  1965년 7월, 미국 뉴포트에서 포크 음악 대축제인 『Newport Folk Festival』이 열렸다. 전국 규모의 포크 축제인 만큼 헤드라이너는 당연히 딜런의 몫이었다. 이날 딜런은 가죽잠바와 선글라스를 착용한 비틀즈 스타일로 나타났다. 그가 무대에 들고 올라온 기타는 어쿠스틱 기타가 아니라 펜더 일렉트릭 기타였다. 뿐만 아니라 알 쿠퍼가 오르간에 앉았고, 마이크 블룸필드가 일렉트릭 기타를 메고 딜런 옆에 섰다. 이날 딜런이 연주한 음악은 그간 포크 팬들이 봐온 어쿠스틱 사운드가 아닌 일렉트릭 사운드의 음악이었다.

  이를 지켜본 관중들은 야를 퍼부었다. 사회를 본 피트 시거는 욕설을 하며 전깃줄을 끊으려 했다. 포크 음악가들에게 어쿠스틱 사운드는 순수성의 상징이었고, 일렉트릭 사운드는 상업성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이날 딜런의 공연이 포크 애호가들에게 모욕으로 받아들여진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당황한 공연 관계자들은 딜런에게 어쿠스틱 사운드를 요청했고, 마지못한 딜런은 <It's All Over Now, Baby Blue>를 불렀다. 하지만 관중들에게는 이 노래마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무언가가 너를 부르고 있어. 디딤돌은 내버려둬. 네가 버린 죽은 사람들은 잊어. 그들은 너를 따르지 않아. 네 문을 두드리는 방랑자는 네가 입었던 옷 속에 서있어. 새로운 걸 시작하자. 다른 경기를 하자. 이제 다 끝났어. 베이비 블루.’ - <It's All Over Now, Baby Blue> 

 
 

매거진의 이전글 [반항의 대중음악가] 밥 딜런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