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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 Jun 30. 2021

[반항의 대중음악가] 마빈 게이④

모타운발 흑인의 반란, 소울 음악의 정석

  게이는 1973년 앨범 《Let's Get It On》이 빌보드 차트 2위, 1976년 앨범 《I Want You》는 차트 4위에 오르는 등 좋은 성적을 이어갔다. 또 1976년에는 처음으로 유럽 투어를 떠났고, 당시 공연을 녹음한 《Live at the London Palladium》 앨범도 1977년 발매됐다. 이 앨범은 라이브 앨범임에도 빌보드 3위라는 대단한 성적을 거뒀다. 이 시기 게이는 모타운과 100만 달러 규모의 재계약을 맺으며 흑인 음악가로는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모타운의 기세가 예전 같지 않으면서 게이의 인기도 서서히 하락하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1970년대 후반, 미국 경제는 호황 국면을 맞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미국 젊은이들도 골치 아픈 사회문제에 관심을 잃게 됐다. 음악도 그저 재밌게 춤추고 놀 수 있는 디스코 음악이 유행했고, 이에 따라 게이의 음악은 빠르게 잊혀졌다. 물론 스티비 원더처럼 1970년대 후반에도 정상급 인기를 누린 모타운 가수가 없지 않았지만 게이는 원더와 달리 자기관리를 제대로 못한 것이 문제였다. 

  게이는 평소 아내 안나 고디와 크고 작은 불화가 있었고, 1973년부터는 사실상 별거 상태에 들어갔다. 결국 1975년 안나 고디는 이혼을 신청해 1977년 법적으로도 완전히 남이 됐다. 사실 게이는 1973년부터 재니스 헌터라는 여성을 만나고 있었다. 재니스 헌터는 《Let's Get It On》 앨범 프로듀서 에드 타운센드의 전 여자친구 바바라 헌터와 재즈 음악가 슬림 갈리아드의 딸로 꽤나 복잡한 관계였다. 타운센드와도 친분이 있었던 재니스 헌터는 《Let's Get It On》 앨범 녹음실에 자주 얼굴을 비쳤고 게이와 깊은 관계에 이르게 된다. 

  안나 고디와 별거 중이었던 1974년, 게이와 헌터 사이에서 노나 게이라는 딸까지 태어났다. 여담으로 노나 게이는 훗날 배우이자 가수로 활동하며 2003년 영화 『The Matrix Reloaded』와  『The Matrix Revolution』에 출연해 인기를 얻게 된다. 2010년 이후로는 별 다른 활동이 없는 상태다. 

  게이와 헌터는 1977년 10월 정식으로 결혼했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 무렵 게이는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헌터에게도 마약을 권하기에 이른다. 마약을 거절하면 가정 폭력으로 이어지곤 했다. 헌터는 2015년 8월 『Mirror』와의 인터뷰에서 “게이의 눈은 마치 원한을 품은 것처럼 붉게 변했다. 나는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그는 식칼을 들고 와 내 목구멍에 넣으려 했다. 나는 겁에 질렸고, 온몸이 마비되는 듯했다. 모든 게 끝난 것 같았다”라고 털어놨다. 

  결국 헌터는 1979년 이혼 소송에 들어가 1981년 2월 정식으로 이혼한다. 이후 원더는 약물을 찾는 일이 잦아졌고 그의 몸도 점점 망가져 갔다. 이 당시 게이는 세금 문제로 미국 국세청과 다투는 등 정신적으로 힘든 일도 많았다. 1981년 발매한 앨범 《In Our Lifetime》은 빌보드 차트 32위를 기록해 게이 치고는 저조한 성적이었다. 

  이 시기 게이는 나름대로 건실한 삶을 살고자 노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1981년 2월부터 프로모터인 프레디 코서트 소유의 벨기에 아파트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코서트의 요구에 따라 게이는 약물을 멀리했고, 교회에 다니며 때로는 운동도 하는 나름대로 성실한 삶을 살았다. 새롭게 태어난 게이는 1982년 앨범 《Midnight Love》를 발매했다. 이 앨범은 빌보드 차트 7위까지 올라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줬다. 그는 앨범 수록곡 <Sexual Healing>으로 1983년 그래미상 최우수 R&B 보컬상도 받았다. 그간 게이는 그래미상 후보 단골손님이었지만 실제 수상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안타깝게도 게이의 영광은 이때가 마지막이었다. 게이는 벨기에에서 미국 LA로 돌아와 부모님과 함께 생활했다. 게이와 그의 아버지는 사이가 나쁜 것으로 유명했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그런 감정도 사라지는 듯했다. 게이는 1983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아버지에게 호신용 권총까지 선물해줬다. 

  해를 넘겨 1984년 3월 31일 게이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보험 서류를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말다툼을 벌였다. 게이는 부모님을 말리고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그저 가끔 있는 사소한 말싸움이었다. 그러나 자정을 넘긴 4월 1일 새벽, 게이의 아버지는 게이의 침실로 들어와 별안간 총을 쏴댔다. 총알은 게이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고, 게이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슬프게도 게이 아버지가 사용한 총은 게이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그 권총이었다. 게이의 아버지는 뇌종양을 앓고 있어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집행유예 6년을 선고 받았다. 

  한때 흑인 사회운동의 아이콘이었던 게이는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최후를 맞았다. 1970년대 후반 보여준 게이의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젊은 음악팬들을 게이를 그저 《What's Going On》 앨범으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오늘날 게이의 업적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가 있었기에 모타운의 사회운동이 빛을 볼 수 있었고, 많은 흑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달할 수 있었다. 물론 인종 차별 문제는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아 오늘날에도 크고 작은 사고가 벌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게이의 출연 이후 일반 흑인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런 게이가 흑인들에게 영웅 대접을 받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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