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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 Jul 16. 2021

[반항의 대중음악가] 스티비 원더①

흑인 운동을 넘어 세계 평화까지 이끈 모타운의 스타

  1963년 8월 빌보드 차트에서 특이한 기록이 나타났다. 빌보드 싱글 차트 최초로 라이브 버전으로 발매된 싱글 <Fingertips>가 1위를 차지한 것이다. <Fingertips>를 부른 주인공은 당시 만 13세에 불과했던 소년으로 역대 최연소 빌보드 차트 1위 기록까지 갈아치웠다. 그 주인공은 바로 모타운의 상징으로 불리는 스티비 원더였다. 

  원더는 맹인임에도 불구하고 천재성을 인정받아 만 11세라는 어린 나이에 모타운과 계약을 맺었다. 누구나 그렇듯 원더도 처음에는 다른 가수들의 공연을 따라다니며 한 두곡 부르는 것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능력을 알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얼마가지 않아 슈프림즈 등과 함께 모타운을 대표하는 음악가가 됐다. 

  원더는 아버지의 학대와 신체적인 장애로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다. 다행히 어머니 룰라 매 하더웨이가 원더를 지극정성으로 돌봐줬지만 그 시대 흑인의 삶은 다들 평범하지 않았다. 원더가 나름 음악가로서 이름을 알린 후에도 흑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종의 차별을 받아야만 했다.  

 1960년대 초반 모타운 음악가들은 『Motortown Revue』라는 이름의 순회공연을 다녔다. 모타운의 음악가들은 대부분 흑인이었고, 이들은 음악과 공연을 통해 인종 간 화합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현실의 벽은 냉혹했다. 숙박시설은 물론이고 식당,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백인 전용’ 간판을 마주해야했다. 그들은 투어 과정에서 백인과 수도 없이 갈등을 겪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백인 전용 구역에 주차를 했다는 이유로 총까지 꺼내들었다. 다행히 지나가던 경찰의 제지로 큰 사건으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원더에게는 충격적인 일들이었다. 

  원더는 음악 활동 초창기 밥 딜런의 저항정신을 동경했다. 1966년 원더가 딜런의 <Blowin' in the Wind>를 리메이크해 부르기도 했다. 기존의 노래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 속에서 날아가고 있어”를 “내가 말해주지.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 속에서 날아가고 있어”라는 식으로 개사해 부른 것이다. 원더는 같은 해 발매된 앨범 《Down to Earth》에서도 딜런의 정신을 이어 받아 사회문제를 진지하게 다뤘다. 이전까지 모타운은 사회문제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Down to Earth》는 슬럼가의 모습을 그대로 앨범 커버에 담으면서 사회운동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길고 외로운 계곡처럼 나는 꿈을 향해 달리고 있어. 움직여. 움직여. 나무 위 가지처럼 나는 자유를 향해 나아가고 있어. 움직여. 움직여.’ - <A Place in the Sun> 

 
 

  이 시기 원더는 마틴 루터 킹 목사 같은 사회운동가들에게도 큰 관심을 보였다. 1966년 1월, 킹 목사는 시카고에서 열린 남부 기독교지도자회의에 참석했을 때 원더는 그를 만나기 위해 회의장까지 찾아가 밖에서 기다렸다. 킹 목사가 회의를 마치고 나오자 원더는 반갑게 다가가 인사했고, 킹 목사 역시 원더의 노래를 칭찬했다. 하지만 킹 목사는 1968년 4월 암살당했고, 두 달 후인 1968년 6월에는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했다. 로버트 케네디 역시 원더가 존경하는 인물 중 한명이었다. 당연하게도 원더 역시 혼란에 빠졌다. 

  1969년에는 리처드 닉슨이 새로운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공화당 출신의 닉슨은 원더와 반대 성향의 인물이었지만 닉슨 취임 초창기에는 둘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69년 5월, 원더는 대통령 산하 장애인고용위원회의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닉슨 대통령은 원더와 그의 어머니 하더웨이를 백악관으로 초대해 악수를 나눴고, 이날 분위기도 화기애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원더는 본인의 사상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는 1971년 5월 그를 키워준 모타운과의 계약을 해지하게 된다. 모타운에서는 그가 원하는 사회운동을 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모타운의 사장 베리 고디는 저항정신을 다룬 음악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실제 1960년대 후반부터 원더가 노래한 흑인 빈민가의 삶과 같은 곡들은 라디오 방송 선곡에서 후순위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원더는 자신이 추구하는 사상을 쫓았고 자연스럽게 고디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마빈 게이와 유사한 길을 걸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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