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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 Jul 24. 2021

[반항의 대중음악가] 스티비 원더④

흑인 운동을 넘어 세계 평화까지 이끈 모타운의 스타

  1984년 이후에도 원더와 만델라의 관계는 이어진다. 1988년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는 만델라의 70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공연이 열렸다. 당시 투옥 중이었던 만델라의 석방을 촉구하는 자선 공연이었다. 이날 공연에는 원더를 비롯해 에릭 클랩톤, 비지스, 휘트니 휴스턴 등 월드스타들이 참여했다.   

  지금 생각하면 해프닝일 수 있겠지만 원더는 어쩌면 당시 공연을 흑역사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이날 원더는 신디사이저에 들어갈 디스크를 잃어버렸고, 무대 위에 올라가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연주를 할 수 없게 되자 트레이시 채프먼이 올라가 원더 대신 두 곡을 불렀다. 채프먼의 공연이 끝난 후에도 디스크는 찾지 못했고, 결국 공연 막판에 다른 밴드의 장비를 써야만 했다. 그럼에도 이날 원더가 부른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는 많은 이들의 박수를 받기에 충분한 공연이기는 했다. 

  1990년 당시 남아공 대통령이었던 클레르크는 여론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만델라를 석방했다. 이때 원더는 <Keep Our Love Alive>를 발표해 만델라를 축하했다. 만델라는 1994년 남아공 대통령에 취임했고 아파르트헤이트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96년 원더는 남아공 프리테리아로 초대받아 만델라를 만났고, 이후로도 가까운 사이로 지냈다. 

  2000년대 이후 원더는 음악보다 사회 활동과 관련한 뉴스를 더 많이 등장했다. 원더 개인적으로도 1995년 《Conversation Peace》와 2005년 《A Time to Love》을 마지막으로 새로운 앨범을 발매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원더는 평화와 차별 반대 등의 캠페인이 벌어지면 항상 1순위로 이름을 올렸다. 또 닥터 드레, 스눕 도기 독 등 힙합 음악가들과도 협업하는 등 음악적 스펙트럼을 넓혀갔다. 

  흑인 인권운동에 누구보다 열성을 쏟았던 원더는 버락 오바마의 열성적인 팬이기도 했다. 오바마는 2007년 미국 대선 출마를 선언했지만 아직은 파워가 강하지 않은 젊은 정치인이었다. 2007년 9월 미국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는 오바마를 위한 기금 마련 행사를 열었다. 이날 행사에는 원더를 비롯해 배우 윌 스미스, 제이미 폭스 등이 참여해 하루 동안 오바마를 위한 성금 300만 달러를 모을 수 있었다. 이후에도 원더는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초대가수로 불려나가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원더는 당시 “오바마는 존 F. 케네디와 마틴 루터 킹을 섞어놓은 것과 같다. 그런 그가 질 수가 없다”고 말했다. 원더의 인생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가 가진 오바마에 대한 기대가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원더는 오바마에게 바치는 곡 <All About the Love Again>까지 발표하는 등 열렬한 지지자로 활동했다. 

  그의 기대대로 2009년 미국은 첫 흑인 대통령을 배출했다. 오바마 역시 원더의 팬으로 2009년 원더가 거슈인 상을 수상할 때 오바마가 직접 참석해 원더에게 상패를 건넸다. 2014년에도 원더는 ‘자유의 메달’을 수상했다. 자유의 메달은 국가 안보나 세계 평화, 문화분야에 뚜렷한 공헌을 남긴 미국인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원더는 2009년 UN 홍보대사로 임명됐다. 세상의 차별에 기죽지 않고 목소리를 낸 원더였기에 홍보대사 임명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UN 사무총장이었던 반기문은 원더에 대해 “우리의 새로운 홍보대사는 수백만 사람들이 존경하고 수백만 사람들에게 베푸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원더는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얻었고 아버지는 폭력적이었으며 그가 살던 주변은 최악의 빈민가였다. 어머니 하더웨이의 헌신이 아니었으면 원더가 음악가로 성공하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원더 역시 어린 시절 폭력적인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했지만 자신을 위해 밤낮으로 일하는 하더웨이를 보며 정신을 바로잡았다. 그 결과 최악의 조건에서 태어난 원더는 최고의 음악가로 성장했다.  

  원더는 성공 후에도 교만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에게 아부하는 사람을 경멸했다. 명성을 얻은 후에도 안주하지 않고 각종 차별에 대해 끝없이 메시지를 던졌다. 지금도 원더는 트위터에서 킹 목사를 언급하는 등 인권운동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적지 않은 흑인과 장애인이 원더를 지켜보며 용기를 얻었고, 세계 인권운동가들은 원더와 함께 하기를 원했다. 오늘날 흑인 인권 나아가 세계 평화를 논할 때 원더의 이름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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