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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 Jul 28. 2021

[반항의 대중음악가] 조 스트러머①

암울한 영국 사회에 나타난 펑크의 영웅

  1970년대 중반, 영국은 유례없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영국의 식민지들이 하나 둘 독립했고, 제조업은 독일과 일본에 밀리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의 경제성장률을 살펴보면 1973년에는 6.52%로 선방했지만 1974년 -2.48%, 1975년 -1.47%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결국 영국은 1976년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지원을 받는 신세로 전략했고, 1976~1979년 플러스 성장을 거두며 한숨 돌렸다. 하지만 오일쇼크로 인해 1980년 경제성장률 -2.03%, 1981년 -0.79%를 기록하는 등 경제는 다시 곤두박질쳤다. 기업의 실적이 악화하자 하나 둘 구조조정을 하기에 이르렀고, 노동자들의 거센 반발로 이어졌다. 

  이렇게 암울한 영국의 분위기 속에서 나온 음악이 바로 펑크 음악이다. 펑크는 구직에 실패한 젊은이들의 분노를 담은 음악으로 정부를 향해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펑크는 단순한 코드 진행과 간단한 연주가 특징이었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닌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정신에 입각한 음악이었다. 

  사실 펑크는 1960년대부터 어느 정도 알려진 음악 장르였다. 그러나 이때는 아마추어 밴드들이 음악을 간단하게 커버하는 수준에 그쳤고, 주류 장르로 평가받지 못했다. 1970년대 들어 미국 뉴욕의 빈민가를 중심으로 펑크가 인기를 끌었지만 반짝 인기일 뿐이었다. 텔레비전, 패티 스미스 등 인기를 얻었던 펑크 음악가들이 각자의 사정으로 너무 빨리 은퇴해버렸고, 1970년대 미국은 세대 간 갈등이 어느 정도 해소돼 대중들이 펑크 정신에 크게 공감하지도 않았다. 

  반대로 영국 대중들은 펑크 음악에 환호했다. 꿈도 희망도 없는 세상에서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그 열기의 절정은 1977년 섹스피스톨즈가 발매한 앨범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였다. 영국 정부, 기독교, 아일랜드까지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비판한 섹스피스톨즈는 순식간에 펑크의 영웅으로 자리 잡았고, 그를 추종하는 펑크 밴드가 런던 거리에 넘쳐났다. 섹스피스톨즈의 음악은 코드 3개로만 연주하는 매우 단순한 것이었기에 교육을 받지 못한 아마추어 밴드도 쉽게 따라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섹스피스톨즈는 소속사와의 불화로 1978년 해체되고 만다.  

  섹스피스톨즈는 해체했지만 펑크의 정신만큼은 죽지 않아 수많은 아류 밴드들이 바통을 이어 받았다. 그 선두주자 중 하나가 바로 조 스트러머가 이끄는 밴드 클래시다. 스트러머가 클래시를 결성한 이유도 단순한데 그저 섹스피스톨즈의 공연을 보고 감동해 지인들과 밴드를 조직했던 것이었다. 클래시의 시작은 섹스피스톨즈의 아류였지만 1986년까지 활동하면서 영국 펑크의 대표주자로 우뚝 서게 된다. 


  스트러머의 어렸을 적 꿈은 만화가였다. 꿈을 위해 미술대학에 재학 중이던 스트러머는 어느 날 한 친구가 우쿨렐레를 사서 연주하는 걸 보고 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기타를 배워 친구들과 101ers라는 밴드를 조직해 종종 공연 무대에도 올랐다. 이때까지 스트러머는 취미로 음악을 즐겼지만 섹스피스톨즈의 공연을 본 후 전업 음악가로 전향하게 된 것이다.  

  런던SS라는 밴드에서 스트러머의 영입을 시도하자 스트러머는 101ers를 탈퇴해 런던SS로 팀을 옮겼다. 런던SS가 그렇게까지 유명한 밴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섹스피스톨즈와 친분이 있었고, 언더그라운드에서도 약간의 이름은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멤버 개인의 사정으로 런던SS는 1976년 해체됐고 런던SS 기타리스트 믹 존스와 베이시스트 폴 시모넌 그리고 스트러머가 팀을 이뤄 클래시를 조직했다. 드러머 테리 차임스까지 영입해 4인조 멤버 구성을 이뤘다. 

  클래시의 1977년 첫 앨범 《The Clash》는 데뷔 앨범임에도 불구하고 펑크 열풍에 힘입어 영국 차트 12위, 빌보드 차트 126위를 기록했다. 126위가 높은 순위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영국의 일개 펑크 밴드가 빌보드 차트에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도 어찌 보면 대단한 것이었다. 《The Clash》 발매 후 차임스는 팀을 떠났고, 몇 번의 우여곡절 끝에 니키 ‘토퍼’ 히든이 드러머로 합류했다. 

  펑크 음악이 대부분 그렇듯 《The Clash》도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담았다. <White Riot> <London's Burning> 등 제목에서부터 대놓고 폭동과 방화를 외쳤다. 재밌는 점은 영국 밴드인 클래시가 미국도 싸잡아 비판했다는 것이다.  

 
 

 ‘양키 형사들은 항상 TV에 나와. 왜냐면 미국의 킬러들은 일주일에 7번 일하거든. 성조기는 신경 쓸 필요 없어. 워터게이트 테이프를 인쇄하자고. 나는 뉴웨이브(펑크의 한 장르)를 향해 경례할게. 아무도 탈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미국이 지겨워. 하지만 뭐 어쩌겠어?’ - <I'm So Bored With the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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