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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 Aug 03. 2021

[반항의 대중음악가] 조 스트러머④

암울한 영국 사회에 나타난 펑크의 영웅

  추억의 음악가 스트러머가 회자된 건 1990년 걸프 전쟁 때였다. 당시 미군 폭탄에 ‘Rock the Casbah’라는 문구가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해당 문구는 1982년 발매된 클래시의 싱글 <Rock the Casbah>와 같은 문구였다. 미군은 사기 진작을 위해 문구를 사용했으며 단순 폭탄에만 적은 것이 아니라 미군 라디오에서도 <Rock the Casbah>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Rock the Casbah>은 지나치게 엄격한 아랍의 법을 다룬 곡이지만 결코 전쟁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스트러머는 그의 음악이 전쟁에 사용된다는 소식을 듣자 죄책감에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1991년 클래시의 싱글들이 CD 형태로 재발매되면서 클래시를 추억하는 팬들도 늘어났다. 논란의 곡 <Rock the Casbah>는 발표 당시 영국 차트 30위에 머물렀지만 재발매 후 영국 차트 15위에 올라 9년 만에 기록을 갈아치웠다. 심지어 1982년 싱글 <Should I Stay or Should I Go>는 9년 만에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이를 부끄럽게 여긴 스트러머느 유고슬라비아 내전 반대 공연에 참여하는 등 반전 운동에 힘을 보탰다. 

  1999년에는 스트러머가 존스와 시모넌을 만나 클래시의 재결합을 논의했다. 예전처럼 떠들썩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클래시의 에너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장 재결합이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클래시의 1978~1982년 공연 음원을 모은 라이브 앨범 《From Here to Eternity: Live》를 발매했고, 2000년에는 클래시의 다큐멘터리 『Westway to the World』를 공개했다. 클래시 재결합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2002년 11월 로큰롤 명예의 전당 위원회는 클래시를 명예의 전당에 헌액한다고 밝혔다. 클래시는 2003년 3월 정식으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릴 예정이었고, 스트러머, 존스 그리고 히든은 명예의 전당 위에서 재결합을 선포하자고 뜻을 모았다. 시모넌은 그런 값비싼 공연 무대에 오르는 건 클래시의 정신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의견을 달리했다. 핵심 멤버 시모넌 없이는 재결합도 무의미했기에 클래시 멤버들은 수차례 회의를 거듭했다. 

  그런데 정말 뜬금없이 2002년 12월 22일 스트러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인은 선천성 심장병이었다. 아무런 예고가 없었던 사망 소식에 재결합을 기대했던 팬들도, 멤버들도 아연실색했다. 스트러머 사망 당시 영국 가수 빌리 브래그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클래시에서 스트러머는 정치적 엔진이었다. 스트러머 없이는 클래시에게 정치적인 의미가 없다. 그리고 클래시 없이는 펑크 음악의 정치적 풍자가 따분한 것이 된다”고 회고했다. 

 
 

  1970년대 중반 클래시는 암울했던 영국에 꿈과 희망을 주는 몇 안 되는 존재였다. 클래시의 공연은 대부분 저렴한 비용에 볼 수 있었고, 심지어는 무료 공연도 적지 않게 진행했다. 정상의 인기를 지녔음에도 돈보다 젊은 관객들을 택한 것이다. 클래시의 인기는 비교적 짧았고, 해체 후 스트러머의 음악적 행보가 크게 성공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야말로 짧고 굵게 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것이다. 

  스트러머 사망 후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논란 대상에 오르곤 한다. 사망 1년 후인 2003년 이라크 전쟁이 벌어졌고, 미국은 또 전쟁터에서 <Rock the Casbah>를 틀어댔다. 지금도 아랍 관련 분쟁이 발생하면 <Rock the Casbah>가 흘러나온다. 비참한 시절 젊은이들을 대표했던 스트러머가 전쟁터의 주연이 돼버린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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