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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 Aug 11. 2021

[반항의 대중음악가] 존 레논①

비틀즈의 전설 그리고 미국과의 정면 승부

  비틀즈는 그 어떤 기준으로 평가해도 대중음악 역사에서 항상 최고로 꼽히는 음악가다. 『Time』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록 음악가, 『Rolling Stone』 선정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1위, 『VH1』 선정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1위 등등 각종 여론조사에서 비틀즈의 위상은 압도적이다. 이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라디오 프로그램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2001년 투표를 실시해 선정한 20세기 대표 음악가 1위에 비틀즈가 올랐다. 

  이처럼 화려한 경력을 가진 비틀즈지만 최고의 자리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비틀즈의 역사는 195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국 리버풀에 살던 평범한 고등학생 존 레논은 학교 친구들과 록 밴드를 조직했다. 레논은 어릴 때부터 기타에 관심이 많았지만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에 동네 밴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여하튼 밴드 활동을 하던 레논은 친구의 소개로 폴 매카트니와 조지 해리슨을 만났고, 이들과 음악 활동을 같이하기 시작했다. 이후 몇 번의 멤버 교체를 거친 후 레논, 매카트니, 해리슨, 세 명의 기타리스트와 드러머 피트 베스트, 베이시스트 스튜어트 셔트클리프, 5인조 멤버를 구성해 어느 정도 진용을 갖췄다. 독일 함부르크로 공연을 떠나는 등 나름대로 순회공연도 가졌다. 셔트클리프는 그저 레논과의 친분으로 밴드에 가입한 것이지 음악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얼마 안 가 밴드를 탈퇴했고, 베이시스트 자리는 매카트니에게 돌아갔다. 

  밴드명은 쿼리맨으로 시작해 조니 앤 문독스, 실버 비틀즈 등을 거쳐 1960년부터 비틀즈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비틀즈는 어느덧 리버풀에서 가장 잘나가는 밴드가 됐고, 그들이 주로 공연했던 리버풀 캐번 클럽은 오늘날까지도 유명 관광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1961년 어느날, 리버풀에서 음반 가게를 운영하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비틀즈에게 접근해 매니저 일을 자청했다. 정식 계약을 맺은 엡스타인은 음반사 사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비틀즈 음반 제작을 추진했고, 마침내 팔로폰 레코드와 계약을 맺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프로듀서 조지 마틴은 베스트의 드럼 실력을 탐탁치 않아한 탓에 베스트 대신 이전부터 비틀즈 멤버들과 친분이 있었던 링고 스타가 새로운 드러머로 영입됐다. 

  1962년, 비틀즈의 첫 싱글 <Love Me Do>는 영국 차트 17위를 기록하며 신인 치고는 나름 괜찮은 성적을 거뒀다. 이어 1963년 첫 앨범 《Please Please Me》는 영국 차트 1위를 거뒀고, 두 번째 앨범 《With the Beatles》 역시 영국 차트 1위를 기록하면서 순식간에 영국 음악계를 정복했다. 비틀즈는 1964년 2월 미국 방송 프로그램 『Ed Sullivan Show』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빌보드 차트 1~5위를 모두 비틀즈 곡으로 채우는 등 미국 시장에서도 압도적인 성공을 거뒀다. 

 
 

  1960년대 비틀즈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성공을 거뒀지만 그들의 삶이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특히 레논은 아이돌 생활에 염증을 느끼며 변화를 추구했다. 1966년 11월, 레논은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일본인 예술가 오노 요코의 전시회를 찾았다. 레논은 순식간에 요코에게 빠졌고, 부인 신시아 레논과 이혼한 후 1969년 요코와 재혼했다. 

  레논은 요코의 영향을 받으면서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보통 결혼을 하면 신혼여행을 가기 마련이지만 톱스타인 레논을 기자들이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레논은 달콤한 신혼여행 대신 자신의 사상을 세상에 알리기로 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베드-인’ 시위다.  

  1969년 3월 25일, 레논과 요코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힐튼호텔 스위트룸 902호에 들어갔다. 그들은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호텔 방 안에서 평화를 외쳤다. 각국에서 온 기자들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맞았는데 이는 철저한 레논의 계획이었다. 레논은 ‘레논과 요코가 결혼하다’라는 뉴스 제목보다 ‘레논과 요코가 결혼한 후 평화를 위한 베드-인 시위를 하다’라는 제목을 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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