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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 Aug 20. 2021

[반항의 대중음악가] 존 레논④

비틀즈의 전설 그리고 미국과의 정면 승부

  1975년 10월, 요코는 레논의 아들 숀 레논을 출산했다. 미국 정권 교체, 추방 명령 철회, 아이 출산 등 레논에게 경사가 겹친 셈이었다. 레논은 전업주부를 선언한 것도 이때다. 그는 음악활동과 사회운동을 잠시 중단하면서 집안일에만 몰두했다. 어쩌면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숀 레논을 보살폈는지도 모르겠다.  

  레논은 1975년 《Rock 'n' Roll》 이후 앨범 발매도 하지 않았고, 외부 활동도 거의 하지 않아 대중들은 레논의 얼굴을 보기 어려워졌다. 그나마 알려진 활동은 링고 스타를 위해 곡 <Cookin' (In the Kitchen of Love)>을 써준 것과 가끔 다큐멘터리 영화에 출연한 정도다. 

  하지만 팬들은 레논의 복귀를 요청했고, 레논도 이를 무작정 외면할 수만은 없었다. 문제는 오랜 기간 음악을 쉬면서 떨어진 자신감이었다. 1980년 어느 날, 복귀라는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한 레논은 머리도 식힐 겸 버뮤다로 항해 여행을 떠났다. 여행 도중 폭풍우가 불었고, 선원들은 피로와 멀미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요트를 운전할 사람이 없어 레논이 직접 운전대를 잡았고 어떻게 요트 운전에 성공했다. 레논이 뭐든 마음먹으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계기이자 음악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한 순간이었다. 

  1980년 11월 레논은 오랜 침묵을 깨고 앨범 《Double Fantasy》를 발매했다. 앨범의 주요 테마는 행복한 가정이었다. 젊은 시절 보여줬던 저항정신, 사회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실 레논은 1970년대 후반부터 일반인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삶을 보내기는 했다. 

  《Double Fantasy》의 첫 곡 <(Just Like) Starting Over>는 경쾌한 종소리로 시작해 첫 솔로 앨범 《Plastic Ono Band》의 첫 곡 <Mother>의 우울한 종소리와 묘한 대비를 이룬다. 레논에게 1970년대 시작이 무거운 투쟁이었다면 1980년대는 상쾌한 마음이었던 것이다. 《Double Fantasy》 발매를 앞둔 1980년 9월, 레논은 『Playboy』와의 인터뷰에서 “모두들 마치 인생이 끝난 것처럼 말년에 좋은 것 하나 낸다고 말한다”며 “그러나 나는 40세, 매카트니는 38세로 우리는 상대적으로 젊다. 모두들 비틀즈의 마지막 콘서트, 마지막 앨범 이런 이야기를 하지만 별 일 없으면 40년은 더 살 것이다”라고 말했다. 레논 스스로도 미래를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아쉽게도 레논의 1980년대는 《Double Fantasy》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980년 12월 8일 오후 5시, 레논과 요코는 당시 거주 중이었던 다코타 빌딩을 나와 스튜디오로 향했다. 그때 마크 채프먼이라는 한 청년이 《Double Fantasy》를 들고 다가와 존에게 사인을 요청했고, 레논은 흔쾌히 사인을 해줬다.  

  그날 일과를 마친 레논은 오후 10시 50분께 다코타 빌딩으로 귀가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낮에 레논의 사인을 받았던 채프먼도 다코타 빌딩 주변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레논과 요코가 리무진에서 내리는 순간 채프먼은 존에게 달려들어 권총을 꺼내들었다. 그는 레논에게 5발의 총알을 쐈고, 이 중 4발이 레논을 관통했다. 대중음악을 지배한 음악가의 마지막치고는 너무 허무한 것이었다. 레논의 사망을 놓고 미국 정부에 의한 정치적 암살이라는 설이 돌지만 아직까지 확인된 것은 없다. 

  《Double Fantasy》는 빌보드 차트 1위, 1982년 그래미 올해의 앨범상 등 각종 상을 휩쓸었지만 이미 레논은 사망한 후였다. 1980년 12월 22일 『Time』의 표지는 레논의 얼굴이었고, 표지 제목은 ‘음악이 죽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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