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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 Aug 27. 2021

[반항의 대중음악가] 노엘 갤러거②

비틀즈의 부활?…브릿팝을 이끈 영국의 반항아

  1995년 10월 발매된 오아시스의 두 번째 앨범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는 오아시스, 나아가 브릿팝의 정수를 보여준 앨범이다. 영국 차트 1위를 기록한 것은 물론이고, 빌보드 차트 4위에 오르는 등 미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앞서 1995년 9월, 오아시스의 라이벌 밴드 블러가 발매한 《The Great Escape》는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하기는 했지만 빌보드 차트 150위에 머물면서 오아시스에 판정패했다. 

  비평가들도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 일색이었다. 일각에서는 비틀즈의 부활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사실 이 명반 탄생의 배경에는 한국도 간접적이나마 관계가 있다. 앨범 작업을 하던 어느 날 노엘 갤러거는 그의 친구인 한국계 미국인 멜리사 림과 통화를 했는데 이날 노엘 갤러거가 “What's the story”라고 묻자 림이 “Morning glory”라고 답한 것을 듣고 앨범 제목을 정한 것이다. 림과 노엘 갤러거의 구체적인 관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황상 연인 관계로 보인다. 

  아무튼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발매 후 오아시스의 공연은 항상 만원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1996년 8월 10~11일 이틀에 걸쳐 진행된 넵워스 공연으로 첫 날은 13만 5000명, 둘째 날은 14만 5000명의 관객이 오아시스를 찾았다. 물론 넵워스 공연이 오아시스 단독 공연은 아니었고, 프로디지, 케미컬 브라더스 등 인기 음악가들도 참여한 축제였다. 하지만 관객들의 관심은 온통 오아시스에 쏠렸고, 오아시스 역시 최고의 공연을 보여주며 화답했다. 넵워스 공연 예매를 시도한 사람은 250만 명에 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남부럽지 않은 인기를 얻은 노엘 갤러거는 슬슬 사회현상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7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공연 『Tibetan Freedom Concert』에 참여한 것이다. 이 공연은 중국 지배 아래 있는 티벳의 평화와 독립을 위한 행사였다. 눈에 띄는 점은 오아시스가 아니라 노엘 갤러거 단독으로 공연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노엘 갤러거의 염원과 다르게 티벳은 아직 독립을 못했지만 적어도 세계인들에게 티벳의 현황을 알리는 효과는 있었다. 이 때문인지 오아시스가 2009년 추진한 중국 공연은 중국 당국의 반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중국 당국은 경제적 이유라고 설명했지만 오아시스 측은 티벳을 지지한 전력 때문에 공연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1997년, 영국 정치 진영에 변화가 발생했다. 1997년 5월 실시된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이 659석 중 418석을 차지하며 보수당에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토니 블레어 노동당 대표는 영국 총리로 취임하면서 1979년 이후 18년 만에 노동당이 집권했다. 

  록에 관심이 많았던 블레어 총리는 취임 후 노엘 갤러거를 관저로 초청했다. 당시 노엘 갤러거는 블레어 개인이 아닌 노동당의 대표를 만나기 위한 것이라는 입장을 확실히 했다. 블레어 총리는 1990년대 후반까지 대중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지만 금융시장 위주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구하는 등 보수적인 모습도 보였고, 이라크 전쟁에도 미국 다음가는 규모의 군대를 파병해 노동당 지지자들의 비판을 적지 않게 받기도 했다.  

  게다가 음악가를 선거전에 이용한다는 논란까지 겹치면서 영국 음악가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됐다. 펄프의 보컬 자비스 코커는 1998년 4월 26일 『New Musical Express』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항상 노동당에 투표해왔지만 내 위치를 선거에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올바른 일이 아니다. 같은 의미에서 블레어 총리가 브릿팝에 상을 주거나 하는 것도 올바르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블레어 총리에 대한 노엘 갤러거의 지지는 확고한 것이었다. 노엘 갤러거는 시간이 많이 흐른 2019년 4월 29일 『GQ Magazine』 인터뷰에서 “블레어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니 그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며 “그렇게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 하는 사람은 블레어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노엘 갤러거의 정치적 행보와 별개로 오아시스는 1997년 8월 세 번째 앨범 《Be Here Now》를 발매했다. 영국 차트 1위를 당연히 차지하면서 오아시스의 인기가 여전함을 보여줬다. 하지만 《Definitely Maybe》나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에 비하면 박한 평가를 받았는데 조화롭지 못한 악기들과 지나치게 긴 음악 시간 때문이었다. 게다가 블러의 《Blur》가 그런지를 도입한 새로운 음악을 시도하며 인기를 끌었고, 라디오헤드의 《OK Computer》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Be Here Now》는 이들에 비해 특색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노엘 갤러거도 훗날 《Be Here Now》를 “아무렇게나 만든 음악”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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