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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 Sep 01. 2021

[반항의 대중음악가] 노엘 갤러거③

비틀즈의 부활?…브릿팝을 이끈 영국의 반항아

  2000년대 들어 힙합 음악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오아시스의 인기도 예전처럼 폭발적이지는 않았다. 오아시스가 2000년 발매한 앨범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나 2002년 발매한 《Heathen Chemistry》가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하기는 했지만 빌보드 차트에서는 20위 안에도 들지 못했다. 판매량도 300만~500만 장 수준으로 1000만 장을 돌파했던 전작들에 비하면 훨씬 떨어졌다. 이대로 오아시스는 잊히나 싶었다. 

  하지만 오아시스의 2005년 앨범 《Don't Believe the Truth》는 세간의 우려를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영국 차트 1위는 놀라울 것이 없지만 빌보드 차트도 12위까지 올라 간만에 10위권에 진입했고, 판매량도 700만 장으로 늘었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전체적인 음반 판매량이 줄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꽤나 괜찮은 성과였다. 싱글로 발매한 <Lyla>와 <The Importance of Being Idle>도 당당히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오아시스 초창기로 돌아가고자 하는 컨셉이 잘 먹힌 셈이다. 한편 앨런 화이트가 2004년 오아시스를 탈퇴하면서 《Don't Believe the Truth》의 드럼은 비틀즈 드러머 링고 스타의 아들 잭 스타키가 맡았다. 스타키는 오아시스의 객원 드러머로만 활동했고, 정식 멤버로는 가입하지 않았다. 

  2008년 앨범 《Dig Out Your Soul》도 영국 차트 1위, 빌보드 차트 5위를 기록하며 완벽한 성공을 거뒀다. 인기에 힘입어 2008년 8월부터 2009년 8월까지 『Dig Out Your Soul Tour』 세계 공연을 진행했고, 당연히 가는 곳 마다 만원이었다. 2009년 4월 1일에는 한국에 방문해 올림픽 공원 체조공연장에서 1만 명 이상의 관객 앞에서 공연을 선보였다. 당시 리암 갤러거는 트위터를 통해 “한국, 너희들은 진짜 미친 듯이 놀랍다고 말하고 싶어. 난 너희 나라가 좋아, 내 사람들이여. 영원히 살자”라고 한국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안타깝게도 오아시스의 활동은 『Dig Out Your Soul Tour』가 마지막이었다. 이전부터 있어온 노엘 갤러거와 리암 갤러거 형제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도저히 같이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노엘 갤러거가 2009년 8월 오아시스 탈퇴를 선언하면서 오아시스는 해체되고 만다. 노엘 갤러거는 노엘 갤러거스 하이 플라잉 버즈라는 이름으로 개인 밴드를 조직해 활동을 시작했고, 리암 갤러거를 포함한 나머지 멤버들은 비디 아이라는 새로운 밴드를 조직해 활동했다. 노엘 갤러거는 오아시스를 탈퇴한 날 홈페이지를 통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발표했다. 

  “내가 오늘 밤 오아시스를 떠나는 것을 말하게 돼 슬프면서도 안심이 된다. 사람들은 그들 맘대로 말하고 쓰겠지만 나는 더 이상 리암 갤러거랑 일할 수 없다. 오아시스의 파리, 콘스탄츠, 밀라노 공연 표를 예매한 사람들에게는 정말 미안하다” 

  노엘 갤러거는 오아시스 탈퇴 후 사회에 보다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010년 5월, 영국 총선 당시 그는 해적당에 투표했다고 밝혔다. 해적당은 2006년 스웨덴에서 최초로 결성된 글로벌 정당으로 2009년 영국 해적당도 창당했다. 2010년에는 벨기에에서 전 세계 해적당을 규합하는 ‘해적당 인터내셔널(PPI)’이 공식 설립됐다. 현재 수십 개 국가에 해적당이 있으며 각국이 연합체를 이루고 있다. 한국에서도 2011년 해적당 결성 움직임이 있었지만 현실의 벽에 막혀 창당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해적당은 인터넷 자유, 특허제도 폐지, 저작권 제도 개혁 등 인터넷 관련 운동에 적극적이다. 젊은 층의 높은 지지를 바탕으로 한때는 대안정당으로 주목받았다. 2016년 아이슬란드 총선에서 국회의원 63석 중 해적당이 10석을 차지하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원내 진입에 실패하거나 성공하더라도 소수 정당에 그쳤다. 이런 상황에서 노엘 갤러거의 해적당 지지 선언은 해적당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다만 노엘 갤러거는 해적당을 지지했다기 보다는 노동당과 보수당이 모두 망가져 해적당을 뽑은 것이라고 훗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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