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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 Sep 04. 2021

[반항의 대중음악가] 데이브 머스테인①

스래시 메탈의 부흥…반전 운동에 온 힘을!

  1970년대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한 헤비메탈은 1980년대 들어 소위 대중음악의 대세로 떠올랐다. 영국에서 NWOBHM(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 열풍이 불면서 주다스 프리스트, 아이언 메이든 등 대형 헤비메탈 밴드가 등장하는가 하면 미국에서는 팝 메탈, 익스트림 메탈, 프로그레시브 메탈 등 별별 하위 장르가 탄생하면서 밴드 하면 무조건 메탈 계열 음악을 한다는 인식까지 심어줬다. 

  록의 기본 정신이 저항인 만큼 대다수의 밴드들은 반항적인 이미지를 가졌다. 그 중에서도 스래시 메탈은 사회 문제에 가장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스래시 메탈은 더블베이스 드럼, 저음역대의 기타 리프와 고음역대의 기타 솔로 등이 특징으로 하드코어 펑크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장르다. 음악 외적으로는 사회 참여적 메시지, 저항적인 가사가 돋보인다. 마침 스래시 메탈의 전성기는 공화당 출신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정부 시기 때였다. 

  평론가들은 대체로 스래시 메탈의 시작으로 1970년대 중반에 등장한 모터헤드를 꼽는다. 1980년대에는 소위 ‘빅4’라 불리는 메탈리카, 메가데스, 슬레이어, 앤스랙스, 4개의 밴드가 스래시 메탈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하나 같이 전쟁을 비판하고 종교와 사회의 부조리를 지적하는 밴드들이었다. 특히 메탈리카와 메가데스는 1980년대 내내 라이벌 구도를 이루면서 팬들에게 이야깃거리를 제공했다. 메가데스의 리더이자 보컬 겸 기타리스트 데이브 머스테인이 메탈리카 출신이라는 점도 이슈 몰이에 한 몫 했다. 실제 머스테인은 메탈리카나 메가데스의 주요 멤버들 중 가장 굴곡진 인생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1961년 태어난 머스테인은 어릴 때부터 기타에 관심을 보였고, 1979년부터 패닉이라는 밴드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패닉은 동네에서 노는 수준의 밴드였기에 머스테인이 만족할만한 라인업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머스테인의 눈길을 끄는 한 일간지 광고가 있었다. 다이아몬드 헤드, 아이언 메이든 같은 메탈 음악가 되고 싶은 한 드러머가 밴드 멤버를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머스테인이 활동했던 LA에는 음악가를 꿈꾸는 청년들이 넘쳐났으며 드러머 라스 울리히도 그 중 한명이었다. 밴드를 하고 싶었던 울리히는 지역 일간지에 밴드 멤버 구인 광고를 실었고, 이를 본 기타리스트 제임스 헷필드가 밴드 활동을 같이 하기를 제안했다.  

  한편 패닉을 탈퇴했던 머스테인도 울리히에게 연락해 밴드에 합류했다. 사실 울리히와 헷필드는 머스테인의 기타 실력보다는 그가 사용하는 고가 장비에 혹해 가입을 허락한 것이었다. 이후 헷필드는 친구 론 맥고브니를 베이시스트로 영입해 4인조 밴드를 꾸렸다. 이것이 1980년대 대표 메탈 밴드 메탈리카의 시작이었다. 다만 맥고브니는 부족한 실력 탓에 얼마가지 않아 밴드에서 쫓겨났고 클리프 버튼이 후임 베이시스트로 영입됐다. 

  인지도만 상대적으로 부족했을 뿐 이미 정상급 실력을 갖고 있던 메탈리카의 성공은 시간문제였다. 그들이 공연하는 클럽은 늘 만원이었다. 당시 공연 프로모터로 일하던 존 자줄라는 메탈리카의 앨범을 발매하고자 1982년 대출까지 받아가며 독립 레이블 ‘메가포스 레코드’를 설립했다. 지금은 메가포스 레코드가 대형 레이블로 성장했지만 시작은 순전히 메탈리카의 앨범을 발매하기 위해서였다. 모험이라면 모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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