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은 흑인만 한다고? NO!" 백인 랩퍼의 반란
1997년 10월, LA에서 랩 올림픽이라는 행사가 열렸다. 랩 올림픽에 참여한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적은 쪽지를 무대에 제출하면 진행자가 임의로 뽑은 두 쪽지에 적힌 사람들끼리 프리스타일 랩 배틀을 벌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승자는 관객이 정했고, 관객의 환호가 엇비슷한 경우에는 패널들이 결정했다.
이날 결승전에는 주스와 에미넴이라는 랩퍼가 올라갔다. 1라운드는 주스가 승리했고, 이에 에미넴은 2라운드와 3라운드를 승리하면서 역전했다. 그러나 이어진 4라운드와 5라운드를 주스가 연이어 승리하면서 최종 승리자는 주스가 됐다. 열 받은 에미넴은 툴툴거리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랩 올림픽 관객 중에는 인터스코프 레코드에서 인턴으로 근무 중인 딘 가이스링어도 있었다. 가이스링어는 왜인지 모르게 우승자인 주스보다 에미넴이라는 남자에게 더 눈길이 갔다. 그는 에미넴에게 다가가 데모 테이프를 줄 수 있냐고 물었고, 화가 잔뜩 나있던 에미넴은 데모 테이프를 던져줬다.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에미넴의 데모 테이프는 인터스코프 레코드 CEO인 지미 러빈에게 넘어갔고, 그는 마침 놀러온 닥터 드레와 그 테이프를 들었다. 닥터 드레는 테이프를 듣자마자 외쳤다. “당장 이 녀석 찾아와” 에미넴이라는 스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은 항상 모종의 차별을 받아왔지만 힙합에서만큼은 예외였다. 흑인이 힙합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백인이 힙합을 하면 오히려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에미넴 역시 활동 초창기에는 백인 주제에 랩을 한다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힙합은 암울한 흑인 사회로부터 시작했기에 주류인 백인이 끼어드는 건 일반적인 일이 아니기는 했다.
사실 에미넴은 슬럼가 출신 흑인 못지않게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에미넴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적 집을 나갔고, 어머니는 상습적으로 그를 학대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탓에 에미넴의 체구는 작은 편이었으며 이로 인해 학교에서도 괴롭힘의 대상이 됐다. 게다가 그가 청소년기를 보낸 디트로이트는 그야말로 슬럼가나 다름없었다. 그냥 지나가다가 얻어터지고 심지어 총을 맞을 뻔한 적도 있었다.
에미넴은 훗날 왜 가난한 백인이 있다는 걸 믿지 못하냐고 토로했다. 미국 사회는 이른바 빈익빈 부익부 사회로 능력이 있으면 떼돈을 벌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매우 빈곤한 삶을 살아야 한다. 자본주의 국가라면 어딘들 안 그렇겠냐만 미국은 그 정도가 심하다. 이러한 미국의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흑인뿐 아니라 수많은 백인들도 어려운 삶을 살지만 이들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여하튼 에미넴은 닥터 드레를 만난 후인 1999년 앨범 《The Slim Shady LP》를 발매했다. 이 앨범은 단숨에 빌보드 2위에 올랐고, 그래미상 최고의 랩 앨범상까지 수상하면서 에미넴도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에미넴이 유명해질 수 있었던 건 그의 훌륭한 랩 실력과 무차별적인 디스때문이었다. 그는 <Role Model>에서 빌 클린턴의 아내 힐러리 클린턴과 내연녀 모니카 리윈스키를 디스했고, <Brain Damage>에서는 어린 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디안젤로 베일리라는 사람을 디스했다.
압권은 <My Name Is>로 영국 걸그룹 스파이스 걸즈를 언급하는가 하면 배우 파멜라 리, 미국 밴드 나인 인치 네일즈, 힙합 음악가 크리스 크로스, 심지어 어렸을 적 영어 선생님과 어머니 데보라 넬슨까지 걸고 넘어졌다.
‘내 삶의 99%는 거짓말을 듣고 살았어. 나는 엄마가 나보다 더 많이 마약을 한다는 걸 알았어. 나는 엄마에게 커서 유명한 래퍼가 될 거라고 했어. 마약하는 음반을 만들어서 엄마의 이름을 붙이겠다고 했어.’ - <My Name 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