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은 흑인만 한다고? NO!" 백인 랩퍼의 반란
사실 에미넴이 대놓고 정부 비판을 한 적은 별로 없음에도 정치권은 그를 끊임없이 공격했다. 외설적이고 공격적인 가사가 청소년들의 정서를 해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미국 정부 입장에서 가끔 경찰을 죽이겠다느니 9·11 테러가 어쩌니 하는 에미넴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2003년 7월 광고회사 유로RSCG가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3%가 ‘미국의 젊은이들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연설보다 에미넴의 가사를 더 신뢰한다’고 답했다.
이러한 긴장 관계가 가시화된 건 에미넴이 2003년 12월 곡 <We as Americans>를 발표하면서부터다. <We as Americans>에는 “나는 죽은 대통령을 위해 랩하지 않아. 차라리 대통령이 죽는 걸 보고 싶어”라는 가사가 포함됐다. 미국국토안전부 비밀수사국은 에미넴에 대한 특별 점검에 들어갔고, 다행히 여기서 사건이 확대되지는 않았다.
에미넴은 2004년 10월 곡 <Mosh>가 발표하면서 부시 대통령 비판 대열에 본격적으로 합류했다. 사실 시기의 문제였을 뿐 누구나 예상했던 바였다. 일명 부시송이라고 불린 <Mosh>는 이라크 전쟁을 석유를 위한 전쟁으로 규정했다. <Mosh>가 수록된 앨범 《Encore》는 부시 대통령뿐 아니라 마이클 잭슨 등 유명인사 여럿을 디스했다. 그럼에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분명 부시 대통령을 노리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Encore》는 에미넴 앨범 중 가장 평가를 못 받는 앨범 중 하나다. 에미넴의 앨범이었기에 당연히 빌보드 1위를 차지했지만 미국 판매량은 500만 장을 겨우 넘었고, 세계 판매량도 1000만 장을 간신히 넘을 정도였다. 전작인 《The Marshall Mathers LP》와 《The Eminem Show》는 모두 미국에서만 1000만 장 이상, 세계 판매량은 2000만 장을 훌쩍 넘겼다. 에미넴도 훗날 곡 <Careful What You Wish For>을 통해 “《Encore》는 전작과 비교할 가치가 없다”고 평가 절하했다. 정부를 비판하면서 대중적 인기를 유지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에미넴의 도전이었던 만큼 언론에서는 <Mosh>를 비중 있게 다뤘다.
‘우리가 이 사막 폭풍을 뚫고 나아가면서. 이 끝나가는 나라에서 그들이 공격하면 반대 의견을 강하게 이야기해. 우리의 차이는 치워 놓고 우리만의 군대를 조직하자. 우리가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대량살상무기를 당장 해체해야 해.’ - <Mosh>
에미넴은 2005년 건강 문제를 이유로 음악 활동을 잠정 중단했다. 그는 당시 수면제 의존증을 앓는 등 개인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유럽 투어도 취소됐고, 새로운 앨범 발매 계획도 멈춰 부시에 대한 디스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맥이 빠졌다. 2005년 12월 발매된 베스트앨범 《Curtain Call: The Hits》에 만족해야만 했다. 에미넴 스스로도 당시 상황을 비관적으로 봤는지 당시 라디오 방송에서 “나는 지금 내 인생 정상에 있고 내 커리어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이것이 마지막이 될 수 있어서 앨범 제목을 《Curtain Call: The Hits》라고 지었다”고 말했다.
알다시피 에미넴의 음악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에미넴은 2006년 그가 설립한 레이블 셰이디레코드를 통해 컴필레이션 앨범 《Eminem Presents: The Re-Up》을 발매했다. 에미넴이 직접 참여한 곡은 <Shady Narcotics> <We're Back> <The Re-Up> <Public Enemy #1> 등으로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곡을 프로듀싱하면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하지만 이 앨범은 빌보드 2위에 머무르며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남들 같으면 빌보드 2위가 엄청난 성과겠지만 에미넴은 무조건 1위를 해야만 하는 음악가였기에 에미넴 치고 좋은 성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에미넴은 좌절하지 않고 2007년 차기 앨범 작업에 착수했다.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낸 에미넴은 과거보다 덜 폭력적이었다. 약물 치료를 겪으면서 힘들었던 점, 휴식기를 거치면서 느꼈던 심경을 솔직하게 표현하려 했다. 그렇게 2년간의 녹음을 거쳐 2009년 앨범 《Relapse》가 탄생했다. 《Relapse》는 단숨에 빌보드 1위를 차지했고, 일부에서는 이전작보다 음악적으로 더 높은 평가를 내린다. 다만 《Encore》처럼 정부 비판에 대한 내용은 들어있지 않았다. 에미넴도 정부를 디스할 생각이 없었는지 《Relapse 2》를 발매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에미넴은 곧 입장을 바꿔 《Relapse 2》를 발매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대신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앨범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2010년 발매된 《Recovery》는 이러한 에미넴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려는 시도였다. 평론가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리기는 하지만 어쨌든 빌보드 1위를 차지해 건재함을 과시했다. 과거와 같은 무차별 디스는 없었고, 설령 누군가를 디스해도 이제는 크게 뉴스가 되지 않았다. 디스 대신 음악성으로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진 2013년 앨범 《The Marshall Mathers LP 2》도 빌보드 1위에 오르며 에미넴은 디스 없이 1990년대 말 못지않은 전성기를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