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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 Sep 16. 2022

'얼터너티브의 영광' 마이클 스타이프

   1990년대 초반 대중음악계는 너바나와 펄 잼을 필두로 한 얼터너티브 록 열풍에 휩싸인다. 유행이란 것은 항상 변화하기 마련이므로 사람들의 관심이 헤비메탈에서 얼터너티브 록으로 옮겨간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얼터너티브 록이라는 장르가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진 건 아니다. 상대적으로 인기가 부족했을 뿐, 이미 1980년대부터 적지 않은 음악가들이 얼터너티브 록을 연주해왔다.  

   얼터너티브 록은 디스토션 사운드를 중심으로 단순한 코드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워낙에 많은 장르로부터 영향을 받은 음악이기에 스타일을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헤비메탈이 인기가 높았던 시절 이 정체불명의 장르가 눈에 띄기는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1세대 얼터너티브 록 음악가가 모두 묻힌 것은 아니다. 1980년대에도 뛰어난 실력으로 정상급 인기를 누린 얼터너티브 록 밴드도 있다. 대표적인 밴드가 R.E.M.으로 이들은 얼터너티브 록의 시작과 전성기를 함께한 그야말로 얼터너티브의 상징적인 인물들이다. 특히 R.E.M.의 작사를 담당한 보컬 마이클 스타이프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가사를 쓰면서 사회운동가들에게도 큰 지지를 받았다.  

 
 

   R.E.M.의 결성은 우연히 이뤄졌다. 1979년 한 음반점 아르바이트생인 피터 벅은 취미로 기타를 쳤지만 전문 음악가로 불릴 정도는 아니었다. 한편 음반점 단골손님이었던 스타이프는 벅을 자주 만나면서 음악에 대한 대화도 자주 나누게 됐다. 마침 두 사람은 같은 조지아대학교 출신이었고, 서로의 생각이 비슷해 밴드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역시 조지아대학교 출신인 드러머 빌 베리와 베이시스트 마이크 밀스를 영입한 후 밴드 이름을 R.E.M.으로 정했다. R.E.M.은 Rapid Eye Movement. 즉 빠른 눈 운동의 약자로 대단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고 사전을 보고 아무 단어나 골라서 정한 것이다. 이때가 1980년 초였다.  

   R.E.M.은 동네 밴드로 시작한데다가 대형 음반사와 계약한 것도 아니기에 불러주는 곳도 없었다. 친구 생일파티 공연, 동네 교회 축제 등에 참여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실력이 있으면 길도 있다고 R.E.M.에 대한 입소문이 퍼지면서 동네 클럽 무대에도 오르기 시작했다.  

   1981년 7월, R.E.M.은 첫 싱글 <Radio Free Europe>을 발매했지만 의미 있는 차트 성적은 거두지 못했다. 사실 조지아에서 R.E.M.의 인지도는 점점 오르고 있었지만 <Radio Free Europe>이 힙-톤이라는 인디음악 전문 레이블에서 발매됐기에 전국적으로 홍보되지 못했다. 힙-톤은 발매한 음반이 10개도 채 되지 않았고, 1980년대 중반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곳이지만 <Radio Free Europe>을 발매했다는 이유로 음악 팬들 머릿속에 남을 수 있게 됐다.  

   R.E.M.은 I.R.S.라는 레이블로 옮겨 EP 《Chronic Town》을 발매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지만 조지아 밖을 벗어나면 무명일 뿐이었다. 1983년 발매된 첫 앨범 《Murmur》도 20만 장 남짓 팔릴 뿐이었다. 비슷한 시기 발매된 마이클 잭슨의 《Thriller》가 수천만 장 판매된 것을 생각하면 비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물론 음악팬들이 아주 외면한 것은 아니라서 《Murmur》는 빌보드 차트 36위라는 데뷔 앨범 치고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뒀다. <Radio Free Europe>도 발매 2년 만에 빌보드 차트에 진입해 78위까지 올랐다.  

   그런데 시장의 반응과 달리 언론과 비평가들은 《Murmur》에게 좋은 평가를 한 수준이 아니라 당대 최고의 앨범급으로 대접했다. 심지어 『Rolling Stone』은 1983년 《Murmur》를 올해의 앨범으로 선정했다. 경쟁작이 《Thriller》, 폴리스의 《Synchronicity》, 데이비드 보위의 《Let's Dance》 등임을 감안하면 충격적인 발표였다. 『Rolling Stone』은 1983년 12월 당시 “R.E.M.의 가사는 난해하지만 흥미롭고 에너지 넘치는 기타 라인이 《Murmur》와 <Radio Free Europe>을 만들어냈다. 이 앨범은 올해 최고의 음악이다”라고 평가했다.  

   물론 『Rolling Stone』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마이클 잭슨, 마돈나, 프린스 등 1980년대를 풍미한 음악가들은 『Rolling Stone』 올해의 앨범에 선정된 적이 한 번도 없고, 1988년에는 다소 생소한 호주 음악가 미드나이트 오일의 《Diesel and Dust》가 선정됐다. 그런가 하면 R.E.M.은 《Murmur》에 이어 1991년과 1992년 《Out of Time》과 《Automatic for the People》로 2년 연속 올해의 앨범에 선정됐다. R.E.M.의 앨범이 훌륭한 것은 사실이지만 너바나의 《Nevermind》를 제칠 수준인지는 의문이 따른다. 여하튼 언론 덕에 당시 마니아에게만 인기가 있었던 R.E.M.이 한순간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R.E.M.의 차기 앨범 《Reckoning》 《Fables of the Reconstruction》 《Lifes Rich Pageant》 등은 모두 빌보드 차트 20위권에 진입하면서 인기를 이어갔다. 스타이프의 보컬도 초창기 정제되지 않은 모습에서 점점 다듬어진 목소리로 변해갔다. 밀스는 1986년 10월 17일 『Chicago Tribune』과의 인터뷰에서 “예전에는 스타이프의 보컬이 가끔 묻힐 때가 있었다”며 “스타이프는 점점 좋아지고 있고, 자신감도 늘어 그의 목소리가 앨범에 잘 묻어난다”라고 말했다.  

   스타이프의 보컬만 발전한 게 아니었다. 스타이프는 1980년대 후반부터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가 사회적인 내용의 가사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도 1987년 R.E.M.의 다섯 번째 앨범 《Document》부터다. 주로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음악가가 정치적인 행보를 보이면 그만큼 부담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Document》는 빌보드 차트 10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New York Times』는 1987년 9월 13일자에서 “《Document》는 R.E.M.을 소수 마니아의 밴드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가진 밴드로 이끌 것”이라고 평가했다.  

   R.E.M.의 대표적인 비판곡 <Exhuming McCarthy>는 무고한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매카시즘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든 악명 높은 정치인 조셉 매카시를 공격한 곡이다. <Welcome to the Occupation>에서는 혼란스러운 엘살바도르의 사회상을 묘사했다. 당시 엘살바도르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군사 정권과 이에 대항하는 게릴라들이 내전을 벌였다. 그러나 가사에서 직접적으로 엘살바도르를 언급하지는 않고, 옷깃 등의 표현으로 미국을 묘사해 비평가들조차 R.E.M.의 뜻을 알아차리기에는 시간이 걸렸다.  

 
 

  ‘네 안쪽에 있는 옷깃을 잡아봐. 네 자유를 더 높이 들어봐. 여전한 구매자들의 말을 들어봐. 혼란을 퍼뜨리는 의회의 말을 들어봐. 반구에서 야생의 불이 타오르고 있어. 설탕 줄기와 커피 컵. 구리, 철 그리고 소. 주석이 달린 역사. 불을 위한 숲. 우리가 수문을 연 곳에서 자유가 대권을 장악했어. 반구에서 야생의 불이 타오르고 있어. 내 말을 들어봐.’ - <Welcome to the Occupation>  

 
 

   스타이프는 1988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후보인 마이클 두카키스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R.E.M.의 여섯 번째 앨범 《Green》은 대선 하루 전날인 1988년 11월 7일 발매됐다. 반전을 주제로 한 <Orange Crush>나 정치인을 조롱한 <World Leader Pretend>같은 곡이 상당수 있었기에 발매 일자를 일부러 맞췄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스타이프는 1992년 3월 5일 『Rolling Stone』과의 인터뷰에서 “1988년에 두카키스를 지지한 것은 두카키스 때문이 아니라 부시 때문이었다”며 “나는 부시를 싫어했고, 지금도 싫어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스타이프의 기대와는 달리 대선의 승자는 공화당의 조지 H.W. 부시였다.  

   스타이프는 환경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Green》이라는 앨범 제목과 어두운 분위기의 앨범 커버도 환경 보호주의를 뜻하는 것이었다. 사실 환경 보호는 스타이프의 공연장 단골 멘트였다. 《Green》의 수록곡 <Stand>는 대표적인 환경 보호를 외치는 곡이다. 스타이프 스스로도 “《Green》 발매 후 나는 재활용 가수로 알려졌다”라고 말했다.  

 
 

   R.E.M.은 잠시의 휴식기를 거친 후인 1991년 《Out of Time》을 내놓는다. 마침 헤비메탈의 인기가 떨어지고, 얼터너티브 록이 대세로 떠오르면서 R.E.M.도 최전성기를 맞는다. 《Out of Time》은 R.E.M. 앨범 최초로 빌보드 1위를 차지했고, 세계적으로 1000만 장 이상 팔리는 대성공을 거뒀다. 이밖에 그래미상 최고의 얼터너티브 록 앨범상, 『Q Magazine』가 선정한 올해의 앨범상 등 각종 상도 휩쓸었다. 바이올린, 호른, 만돌린 등의 악기를 사용해 기존 록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이색적인 사운드를 내고, 어쿠스틱 기타를 통해 조용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등 음악적으로도 진화된 모습을 보였다.  

   《Out of Time》은 상업적으로 성공했지만 R.E.M. 특유의 냉소적인 사회 비판적 가사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사회의 밝은 면을 묘사하거나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스타이프를 비롯한 R.E.M. 멤버들이 오랜 밴드 생활로 지쳐있기 때문이었다. 밀스는 훗날 “당시 우리의 커리어가 너무 완만했기에 인생을 바꿀만한 이벤트가 거의 없었다”고 회고했다.  

   아무튼 R.E.M.은 《Out of Time》에 이어 1992년 발매한 《Automatic for the People》으로 다시 한 번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Out of Time》과 같은 서정적인 분위기를 묘사했지만 이번에는 사회 비판 메시지도 곳곳에 담았다. 영국 차트 1위, 빌보드 차트 2위를 거두는 등 대중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고, 『New Musical Express』가 선정한 올해의 앨범상, 『Q Magazine』가 선정한 올해의 앨범상 등을 수상하면서 비평가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스타이프 개인적으로도 환경, 인권 등 사회문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환경단체에 기금을 전달하는가 하면 공연장에서도 환경 문제를 자주 언급했다. 1991년 『MTV』 비디오 음악 시상식에서는 여러 장의 티셔츠를 가져왔다. 각 티셔츠에는 환경 문제를 의미하는 ‘우림’ 인권 문제를 뜻하는 ‘사랑은 인종을 모른다’ 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세계적인 동물보호단체 PETA와도 각종 캠페인을 벌일 정도였다.  

 
 

  ‘이 잡것들은 수년간 미국과 싸운 희생자들의 힘을 빼앗았어. 모든 도덕과 진실을 부숴버렸어. 사회 민주주의를 최악의 구렁텅이로 넣어버리고 벼랑 끝에서 잃어버린 양은 수영장으로 흘려버렸어.’ - <Ignoreland>  

 
 

   1994년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서 얼터너티브 록에도 일대 변화가 발생했다. 너바나가 사실상 해체되면서 얼터너티브 록의 중심도 그런지에서 펑크와 브릿팝으로 넘어갔다. 얼터너티브 록은 펑크의 단순한 코드와 사회 비판적인 태도를 계승한 장르지만 1990년대 네오 펑크는 얼터너티브 록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네오 펑크는 기존 펑크에 팝적인 요소를 가미한 것이 특징으로 대중적인 인기가 상당히 높았다.  

   R.E.M.은 반대로 펑크에서 그런지로의 변화를 시도했다. 이전까지 R.E.M.은 포크 같은 장르에 도전한 적도 있었지만 음악의 기초는 어디까지나 펑크에 있었다. 그러나 R.E.M.의 1994년 앨범 《Monster》는 펑크도 아니고, 가끔 시도했던 포크도 아닌 누가 뭐래도 그런지 스타일의 음악이었다. 앨범 곳곳에는 코베인을 추모하는 듯한 메시지도 보인다. 특히 <Let Me In>에서 “나는 그저 너의 속삭임을 들을 수라도 있으면 좋겠어”라며 안타까워했다.  

   R.E.M.에게 있어 《Monster》는 새로운 시도였지만 빌보드 차트와 영국 차트 모두 1위에 오르면서 대중들에게 인정받았다. 그런지의 또 다른 거장 펄 잼의 1994년 앨범 《Vitalogy》도 빌보드 1위에 오르는 등 적어도 1994년까지는 그런지가 대세였던 것이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찾아왔다. 1995년 R.E.M.의 스위스 공연에서 베리가 갑자기 쓰러진 것이다. 베리는 뇌동맥류 진단을 받았고, 다행히 치료는 무사히 끝났지만 정상적인 음악 활동은 하지 못해 결국 1997년 R.E.M.을 탈퇴했다. 한편 밀스도 1995년 장관유착 치료를 위해 복부 수술을 했고, 스타이프는 탈장 치료를 받는 등 한동안 R.E.M. 멤버들은 건강 문제로 고생했다. 이들이 휴식을 취하는 사이 록의 주류는 네오 펑크와 브릿팝이 양분했고, 그런지의 존재감은 희미해졌다. 그나마 1996년 앨범 《New Adventures in Hi-Fi》와 1998년 앨범 《Up》은 각각 빌보드 차트 2위, 3위에 오르면서 체면치레는 했지만 2001년 앨범 《Reveal》은 빌보드 차트 6위라는 R.E.M.에게 어울리지 않는 성적을 거뒀다.  

  2000년대 들어 R.E.M.은 음악보다 사회 운동 분야에서 더 자주 등장했다. R.E.M.이 관심을 보인 곳은 다름 아닌 미얀마와 아웅산 수치였다. 수치는 2000년대 초반 서방국가와 접촉하면서 미얀마의 인권 문제를 호소하다가 2003년 미얀마 군부에 의해 구금됐다. 국제사회에서는 수치의 석방을 촉구했으며 한국 국회의원들도 수치의 석방과 정치적 자유보장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심지어 정치적으로 수치와 반대편에 있을법한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도 수치의 석방을 촉구했다.  

  2004년, 수치를 지지하는 음악가들이 모여 앨범 《For the Lady: Dedicated to Freeing Aung San Suu Kyi》를 발매했다. R.E.M.을 비롯해 폴 매카트니, 에이브릴 라빈, 콜드플레이, 펄 잼, U2, 에릭 클랩톤, 스팅 등 정상급 음악가들이 함께한 앨범이었다. 앨범 작업에 특히 적극적으로 임한 사람은 스타이프였다. 그는 2004년 9월 22일 『BBC』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그녀를 위해 당당하게 설 것이다. 그녀도 스스로 다시 당당하게 설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R.E.M.은 2005년 6월 19일 수치의 60세 생일을 맞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공연을 열었다. 스타이프는 공연장에서 “우리는 그녀의 생일을 마음으로 기도한다. 수치는 그녀의 사람들 사이에서 당당히 걸을 날이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수치의 가택 연금은 5년이 지난 2010년에서야 해제됐지만 2021년 다시 구금되면서 미얀마 민주화 시위가 벌어졌고, 현재까지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스타이프는 2004년 미국 대선에서도 존재감을 보였다. 당시 민주당은 재선을 노리는 부시 대통령에 맞서 존 케리 상원의원을 후보로 내세웠다. R.E.M.은 대선을 앞두고 케리를 지지하는 공연 『Vote for Change』에 참여했다. 『Vote for Change』는 미국 전역에서 약 10일 동안 동시 다발적으로 열린 공연으로 R.E.M.은 워싱턴, 필라델피아 등을 돌며 무대에 올랐다. 그러나 스타이프의 기대와 달리 부시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했다. 

 
 

  R.E.M.은 정치적 활동에 적극적인 2000년대를 보냈지만 음악적으로는 평가가 엇갈린다. 2004년 앨범 《Around the Sun》은 느려진 템포로 인해 과거와 같은 R.E.M.만의 파워가 사라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정치적인 목소리만 내다보니 메시지에만 집중해 음악성을 잃은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이 때문인지 《Around the Sun》는 빌보드 차트 13위라는 1990년대 이후 최악의 성적표를 받았다. 

  헤비메탈 사운드를 접목시킨 2008년 앨범 《Accelerate》는 빌보드 차트 2위에 올라 명예회복에 성공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효과였고, 50대 중반인 그들에게 이전과 같은 힘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2011년 《Collapse into Now》를 마지막으로 R.E.M.은 해체를 결정했다. 당시 R.E.M.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다음과 같이 알렸다. 

 
 

 ‘우리의 팬들과 친구들에게 : R.E.M. 그리고 오랜 친구들이자 동료로서, 우리는 밴드의 해산을 결정했다. 우리는 그간 이룬 것에 대해 감사, 놀라움, 마지막의 감정을 가지고 간다. 우리의 음악을 들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한다.’ 

 
 

  갑작스러운 해체 소식에 팬들은 놀랐지만 사실 이전부터 멤버들은 해체를 논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30년 이상 R.E.M. 활동을 하면서 개인적인 삶을 보내지 못한 그들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스타이프는 R.E.M. 해체 후 <Drive to the Ocean> 등 솔로곡을 내기도 했지만 크게 이슈가 되지는 못했다. 

  2010년대 이후로는 R.E.M.이 왕년에 잘 나갔던 밴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평가를 받고 있다. 크게 존재감을 드러낼 일도 없고, 얼터너티브 록이 인기를 회복하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타이프와 R.E.M.은 얼터너티브 록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 음악가로 록 본연의 저항정신을 항상 유지했다. 전성기가 짧았던 너바나, 멤버 교체가 잦았던 펄 잼과 비교하면 한 곳에서 변함없이 얼터너티브 록을 연주한 R.E.M.은 높게 평가할 만하다. 평범한 대학생이 대스타가 됐으면 인기에 취할 법도 하지만 항상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움직인 R.E.M.의 정신은 먼 훗날에도 귀감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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