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국내 기타 제조사 콜트악기는 직원들을 상대로 대량 해고를 진행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경영난 때문이었다. 콜트 기타는 나쁘지 않은 스펙과 저렴한 가격 덕에 기타 입문자와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2000년대 후반 스쿨밴드에서 콜트 기타를 든 기타리스트는 흔하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해외에서도 콜트의 인기는 높아 한때 세계 기타시장의 30%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콜트 내에서는 해고로 인해 사측과 직원 간 갈등의 골이 깊어졌고, 콜트 계열사인 콜텍(기타 OEM 업체) 직원들은 오랜 투쟁 끝에 2019년 복직했지만 콜트악기 직원들의 투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콜트 직원들의 투쟁 소식이 알려지자 대중음악계는 콜트 사측에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2008년부터는 매달 홍대 클럽에서 ‘콜트콜텍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와 함께하는 문화제’가 열렸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콜트 직원들을 지지하는 음악가가 등장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시스템 오브 어 다운의 보컬 세르이 탄키안과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TM)의 기타리스트 톰 모렐로였다. 특히 모렐로는 2010년 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LA) 한인타운을 찾아 “기타는 자유를 위한 수단이지 착취의 수단이 아니다”라며 “일터에서의 권리를 요구하는 한국 노동자들을 완전히 지지한다”라고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말을 남겼다.
모렐로는 할렘가 출신에 메탈 기타리스트라는 이유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지만 사실 그는 하버드대학교 출신의 수재다. 뿐만 아니라 조모 케냐타 케냐 초대 대통령의 종손자이고, 어머니인 메리 모렐로는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지금 기준으로 봐도 꽤 괜찮은 가정환경이다. 또 모렐로는 할렘가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시카고에서 대부분의 유년 생활을 보냈다.
모렐로는 10대 시절 헤비메탈에 매료돼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 등의 음악을 즐겨 들었고, 나중에는 런DMC와 같은 힙합 음악에도 관심을 가졌다. 여느 음악에 관심 많은 학생들처럼 모렐로도 10대부터 기타를 쳤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전문 음악가가 아닌 그저 취미 생활일 뿐이었다. 모렐로가 음악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대학 졸업 후인 1987년, 락 업이라는 밴드에 가입하면서부터다. 락 업은 LA 지역에서 활동하던 메탈 밴드로 기타리스트 공백이 생기자 모렐로가 그 자리에 들어간 것이다.
락 업은 1989년 데뷔 앨범 《Something Bitchin' This Way Comes》를 발매했지만 큰 인기는 얻지 못했고, 1990년 해산했다. 이후 모렐로는 인사이드 아웃에서 보컬을 맡았던 잭 데 라 로차와 그의 친구인 베이시스트 팀 커머퍼드, 과거 락 업 가입 오디션에서 탈락했던 드러머 브래드 윌크를 영입해 새로운 밴드 RATM을 조직했다. 특히 랩퍼 출신인 로차의 활약 덕에 RATM은 랩메탈이라는 장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RATM이 1992년 발매한 데뷔 앨범 《Rage Against the Machine》은 빌보드 앨범 차트 45위를 차지하면서 나름 괜찮은 성적을 거뒀다. 음악적으로도 괜찮은 평가를 받았지만 대중들의 눈길을 끈 것은 그들의 메시지였다. 앨범 커버에는 미국 제국주의에 반대해 분신자살한 베트남 승려 틱꽝득의 사진이 실렸다.
RATM은 수록곡 <Know Your Enemy>에서 반전과 평화를 외쳤고, <Wake Up>에서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말콤 X의 피살을 다뤘다. 지금도 그들의 대표곡으로 꼽히는 <Killing In the Name>은 백인 주류 사회에 대해 비판했다. 여담으로 이 곡은 발매 17년 후인 2009년에야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했다. 당시 영국의 오디션 프로그램 『X Factor』 출신들이 차트를 독점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진 팬들이 노력한 결과였다. 국내에서도 RATM의 인기는 대단해 1998년 H.O.T.의 곡 <열맞춰!>가 <Killing In the Name>을 표절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RATM은 SM엔터테인먼트를 상대로 법적다툼을 고려했지만 고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죽은 사람들은 배지를 달고 있다는 이유로 정당화된다. 그들은 선택받은 백인들이야. 너는 배지를 달고 있다는 이유로 죽은 사람들을 정당화해. 그들은 선택받은 백인들이야. 꺼져. 나는 네 말대로 하지 않을 거야. 꺼지라고.’ - <Killing In the Name>
랩메탈이라는 다소 생소한 장르의 파괴력, 세상을 향한 거침없는 욕설에 대중들은 열광했다. 1990년대 인종 차별을 부르짓는 장르가 힙합뿐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특히 멤버인 로차는 멕시코계로 어린 시절 인종 차별에서 자유롭지 못했기에 이들의 외침은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매력적이면서 정치적 의식이 있는 데뷔였다. 로차는 밥 말리의 카리스마와 척 디의 랩 스타일을 섞어 놓은 진짜 스타다. 그의 랩은 가차 없고, 음악 자체도 터프하다.’ - 2002년 12월 1일 『Los Angeles Times』
이후 RATM은 사파티스타 민족 해방군(EZLN)을 지지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EZLN은 멕시코 치아파스 주의 마야계 원주민들에 대한 토지분배와 처우개선 등을 요구하며 들고 일어난 반정부 투쟁단체다. EZLN은 1994년부터 활동을 시작해 현재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보이고 있다. EZLN은 무장을 한 투쟁단체지만 특이하게도 평화시위를 통한 문제 해결을 추구한다.
RATM의 두 번째 앨범 《Evil Empire》는 첫 앨범 발매 4년이 지난 1996년 3월에야 발매됐다. 《Evil Empire》 역시 정치적 메시지가 가득한 앨범이다. 로차는 당시 『MTV』와의 인터뷰에서 “《Evil Empire》는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을 비판한 것에 대한 RATM의 시각”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미 소련은 수년전에 해체됐기에 뒷북이라는 지적도 있었지만 《Evil Empire》는 당당히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했다.
《Evil Empire》를 우리말로 해석하면 사악한 제국이다. 여기서 제국은 미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실상 미국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앨범이었다. 앨범 발매 후 RATM 멤버들은 『Saturday Night Live』에 출연해 성조기를 거꾸로 메달아 펼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당황한 방송국 직원들은 성조기를 끌어내리고 RATM 멤버들을 무대에서 쫓아냈다. 직원들은 방송국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기는 했지만 훗날 방송을 이어가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99년 7월 우드스탁 콘서트에서는 아예 성조기를 불태워버렸다. 이는 커머퍼드의 계획으로 알려졌으며 마지막 곡인 <Killing in the Name>을 부르는 와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날 공연에는 메탈리카, 림프 비즈킷 등 쟁쟁한 음악가들이 함께했지만 대중들의 시선은 온통 RATM을 향했다.
1999년 11월 발매된 RATM의 세 번째 앨범 《The Battle of Los Angeles》도 당당히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수록곡 <Calm Like a Bomb>은 영화 『The Matrix Reloaded』에 삽입되는 등 록 마니아가 아닌 일반 대중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었다. 평론가들에게도 인정을 받아 『Rolling Stone』과 『Time』은 1999년 최고의 앨범으로 《The Battle of Los Angeles》를 꼽았다.
앨범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곡은 <Guerrilla Radio>였다. 당시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놓고 알 고어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는가 하면 무미아 아무자발의 무죄를 주장했다. 아무자발은 블랙팬서 활동가 출신의 기자로 1981년 백인 경찰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당초 아무자발의 사형은 1999년 말 집행될 예정이었지만 이후 가석방 없는 종신형으로 감형돼 현재도 복역 중이다.
‘누가 은행을 가득 채우나. 누가 파티에 참여하는가. 고어를 위해 아니면 마약왕의 아들. 저 위에는 아무 것도 없으니까 끈을 잘라버려. (…) 무미아의 자유를 외치자. 누가 연방 정부 파일을 체크했는가. 너희 모든 펜 악마들은 그 재판이 비도덕적이라는 것을 알잖아. 돼지들의 군대는 내 스타일을 조용히 만들려 하고 있어.’ - <Guerrilla Radio>
RATM의 앨범은 연이어 성공하고, ‘좌파밴드’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의 화제성까지 따라붙었다. 하지만 이들의 인기가 오래간 것은 아니었다. 로차가 2000년 RATM을 탈퇴하자 인기가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로차는 당시 『MTV』와의 인터뷰에서 탈퇴 이유에 대해 “밴드로서 모인 우리 네 명의 열망이 더 이상 보이지 않고, 내 생각이 우리의 예술적이고 정치적인 생각을 악화시키고 있다”라며 “나는 음악가로서나 활동가로서나 우리들의 일에 매우 자부심을 느끼고, 우리의 경험을 공유하고 결속력을 표현해 준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한다”라고 말했다.
로차가 탈퇴하자 모렐로와 커머퍼드, 윌크, 세 사람은 새로운 보컬을 찾아야만 했다. 한때 오지 오스본의 백밴드가 되는 고려했지만 그들은 사운드가든 보컬 출신 크리스 코넬과 함께 ‘오디오슬레이브’라는 밴드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오디오슬레이브의 첫 앨범 《Audioslave》가 빌보드 차트 7위를 차지한데 이어 이어진 앨범 《Out of Exile》과 《Revelations》은 각각 1위와 2위를 차지해 RATM 시절 못지않은 인기를 이어갔다.
‘좌파밴드’라고 불리던 RATM과 달리 오디오슬레이브는 정치적인 색깔이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다. 코넬이 지나친 정치색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정치와 아예 거리를 둔 것은 아니고 이라크 전쟁 같은 큰 사건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비판했다. 오디오슬레이브는 2003년 3월 할리우드 공연에서 “1 갤런 당 얼마나 많은 이라크인이 필요한가”라며 “텍사스 근처 마을에서 얼간이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수위 높게 비판했다.
하지만 모렐로는 이정도 저항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오디오슬레이브와 별개로 나이트워치맨이라는 개인 밴드를 조직해 활동했다. 순전히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기 위한 활동이었다. 나이트워치맨은 2000년대 중반 앨범 발매 대신 공연 활동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클래시, 브루스 스프링스틴, 펄 잼 등과 함께 앨범 《Songs and Artists That Inspired Fahrenheit 9/11》을 제작한 것을 계기로 녹음 작업에도 참여하기 시작했고, 2007년 《One Man Revolution》, 2008년에는 《The Fabled City》를 각각 발매했다. 차트 성적은 별 볼일 없었지만 애초에 상업성이 아닌 정치적 메시지 전달을 위해 만든 앨범이었다. 『Allmusic』은 《One Man Revolution》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다른 포크 멜로디처럼 이 앨범의 멜로디도 친숙하다. 모렐로는 복잡하거나 혁신적인 것을 목표로 하지도 않았다. 대신에 그는 그 자체에 대해 시도했고, 그 자체에 대해 나아갔다. RATM의 노래 <Voice for the Voiceless>처럼 말이다.’ - 2012년 1월 9일 『Allmusic』
그러나 코넬 입장에서는 오디오슬레이브를 놔두고 독자적인 활동을 하는 모렐로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코넬은 정치적 색깔이 짙은 멤버들과의 성격도 맞지 않았다. 크고 작은 갈등이 이어지다가 코넬은 2007년 2월 오디오슬레이브를 탈퇴한다고 밝혔다. 코넬이 밝힌 탈퇴 이유는 ‘음악적 견해 차이’와 ‘해결할 수 없는 성격 차이’였다.
코넬의 탈퇴 후 음악팬들 사이에서는 RATM 재결합설이 끝없이 흘러나왔다. 모렐로와 로차는 RATM 해체 후에도 지속적으로 연락을 하는 사이였기에 재결합설이 나오는 게 일상한 일은 아니었다. 또 모렐로와 코넬의 갈등 원인이 성격 차이였던 반면 로차는 모렐로 못지않은 반항아였기에 성격적으로도 맞는 편이었다.
정치적 열망으로 가득한 모렐로와 로차는 2007년 4월 『Coachella Valley Music and Arts Festival』 공연에서 다시 뭉쳤다. 원년 멤버 그대로의 RATM이 재결합하는 순간이었다. 이날 공연 뒤편에는 EZLN 깃발이 걸려있었다. RATM은 이후 『Rage Against the Machine Reunion Tour』라는 이름을 건 공연을 시작했다. 뉴욕, 샌프란시스코, 라스베이거스 등 미국 지역은 물론이고, 일본, 호주, 독일, 영국, 프랑스, 칠레, 브라질 등 세계 전역을 돌아다녔다.
RATM은 이 시기 다시 한 번 파격 행보를 보였다.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둔 2008년 9월, 공화당은 미네소타주 세인트폴 엑셀에너지 센터에서 존 매케인 상원의원을 정후보로 지명하기 위한 전당대회를 열었다. 당시 초강력 허리케인 ‘구스타프’가 미국 남부 지역을 강타해 분위기가 좋지만은 않았다.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도 전당대회 대신 구스타프로 피해를 입은 텍사스주를 방문했다.
전당대회 둘째 날이었던 2008년 9월 2일, 엑셀에너지 센터 바로 옆에서 록 공연이 열렸다. 공화당을 반대하는 미국 시민들이 모인 일종의 항의 공연이었다. RATM은 당연히 이런 자리에 빠지지 않았고, 무대 위로 올라가 공연을 하려 했다. 그러나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이 RATM의 공연을 저지했고, RATM은 무대 아래에서 노래를 불러야만 했다. RATM은 이날 밤 시민들과 함께 가두행진에 참여했다.
다음날인 9월 3일, 인근에 위치한 타겟센터 종합운동장에서 RATM의 공연이 열렸다. 공연의 주요 목적은 당연히 공화당 비판이었고, 공연 후 흥분한 관객들은 반공화당 가두행진 시위를 벌였다. 이날 경찰에 체포된 사람만 100명이 넘었다. 정치적 올바름을 떠나 RATM은 민주당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힘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은 시위대를 거리 한쪽으로 몰아넣었고, 스무 명 정도의 팬들만 현장을 빠져나왔다. 경찰은 후추 스프레이를 동원해 시위대를 격파했다. 체포된 사람을 감옥으로 데려가기 위해서는 총 두 대의 버스가 필요했다. 공화당 전당대회 덕분에 동네는 야생과도 같은 일주일을 보냈다.’ - 2008년 9월 4일 『Rolling Stone』
RATM은 이후에도 전쟁 포로들을 수용한 쿠바 관타나모 감옥의 폐쇄를 요구하는가 하면 브라질 공연에서는 토지분배를 요구하는 농민들과 함께 행동했다. 콜트기타 해고 사태를 비판한 것도 이때쯤이다. 재결합 후 앨범은 내지 않고, 공연과 사회운동에 몰두하다보니 일각에서는 RATM을 음악가가 아닌 사회운동가로 분류하기도 했다.
오바마 대통령 당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2011년 이후 RATM 멤버들은 사회활동보다는 각자 솔로 활동에 매진했다. 모렐로는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E스트리트밴드라는 팀을 조직해 활동했고, 오랜만에 나이트워치맨 이름으로 앨범 《Union Town》과 《World Wide Rebel Songs》를 발매하기도 했다.
2016년에는 RATM 멤버인 모렐로, 커머퍼드, 윌크에 더해 퍼블릭 에너미의 척 디와 디제이 로드, 사이프러스 힐의 비 리얼 등 여섯 명이 모여 프로펫츠 오브 레이지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새로운 음악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을 막기 위해 조직한 것이었다. 로차는 개인 활동을 이유로 프로펫츠 오브 레이지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 일로 모렐로와 로차의 사이가 멀어졌다는 소문도 있지만 공식석상에서 서로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프로펫츠 오브 레이지는 2016년 5월부터 10월까지 『Make America Rage Again Tour』라는 이름의 공연을 펼쳤는데 공연장에서는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을 반대하는 목소리로 넘쳐났다. 이들의 기대와 달리 트럼프는 대통령에 당선됐고, 프로펫츠 오브 레이지는 2017년 앨범 《Prophets of Rage》에서 울분을 토해냈다. 《Prophets of Rage》는 빌보드 차트 16위를 차지해 프로젝트성 밴드치고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뒀다.
모렐로와 RATM은 사회운동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음악가로서의 존재감은 갈수록 약해지고 있다. RATM은 2000년 앨범 《Renegades》 이후 20년이 넘도록 앨범을 발매하고 있지 않다. 2020년 RATM의 세계 공연이 예정됐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무기한 연기된 상태다. 그 사이 다른 유명 밴드들이 치고 올라오면서 RATM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RATM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당연히 그들의 음악이었다. 모렐로는 1990년대 지미 헨드릭스라 불릴 정도로 엄청난 기술을 구사하는 기타리스트였다. RATM이 데뷔한 1990년대는 헤비메탈의 유행이 끝난 시기였음에도 랩메탈이라는 장르를 개척해 빌보드 정상에 오른 것은 당연히 그들의 실력덕분이었다. RATM이 메탈계의 밥 딜런으로 불려도 전혀 문제가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