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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 May 19. 2021

[반항의 대중음악가] 짐 모리슨④

히피의 상징, 따라갈 수 없는 반항아

  모리슨의 관심이 음악에서 시로 옮겨갔지만 이것이 자숙을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1969년 11월 모리슨은 롤링스톤즈 공연을 보기 위해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로 향했다. 모리슨은 이날 비행기에서 샌드위치와 컵을 던지는 등 난동을 부렸고 결국 착륙 후 FBI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번에도 모리슨은 2500달러를 보석금으로 내고 구속 신세를 면했다. 

  그런 와중에도 도어즈의 음악적 성과는 나쁘지 않았다. 1970년 2월 발매된 앨범 《Morrison Hotel》은 빌보드 차트 4위에 오르면서 여전한 인기를 보여줬다. 다만 이후 공연에서 예전과 같은 대형 사건사고는 발생하지 않았고, 모리슨의 광기도 한풀 꺾였다. 

  도어즈는 1970년 중반을 공연 활동으로 보내고 후반부터 앨범 《L.A. Woman》 녹음 작업에 들어갔다. 1970년은 비틀즈가 해체되고 헤비메탈이 태동하는 등 대중음악계에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였다. 당연히 도어즈의 입지도 예전 같지 않아 고전을 예상했지만 의외로 《L.A. Woman》은 예나 지금이나 상당히 호평 받는 앨범이다. 

  모리슨은 《L.A. Woman》 작업이 끝난 후인 1971년 그의 애인 파멜라 커슨과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모리슨은 시 못지않게 미술에도 관심이 많았기에 예술의 도시 파리는 모리슨에게 매력적인 곳이었다. 물론 그 성격 어디가지 않아서 술 먹고 난동부리는 건 일상이었지만 그래도 면도하고 살도 빼는 등 아주 막장인 삶은 아니었다. 

  그렇게 파리에서 조용히 지내던 1971년 7월 3일, 짐 모리슨은 사망했다. 지병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교통사고도 아닌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정말이지 밑도 끝도 없는 사망 소식에 전세계 젊은이들은 당황했고, 자연스럽게 음모론이 이어졌다. 공식적인 이야기는 모리슨이 사망 전날 밤 피를 토했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목욕을 하러 갔다가 그대로 욕조에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커슨은 경찰을 부르지도 않았고, 사체 부검도 하지 않았기에 각종 의혹이 불거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모리슨 사망 직후 관계자들은 관련 소식을 최대한 은폐하려고 시도했지만 그러기에 모리슨은 너무 거물이었다. 

 
 

 ‘모리슨의 죽음은 비밀로 부쳐졌다. 그러나 지역 나이트클럽 DJ들이 관련 내용을 취재해 세상에 알렸다. 소문은 바로 그날 밤 런던에 전해졌고, 자세한 내용을 원하는 사람들이 파리에 몰려들었다. 미국 대사관은 월요일(1971년 7월 5일)까지 관련 소문을 듣지 못했다. 마침내 파멜라 커슨이 모리슨을 ‘제임스 모리슨, 시인.’이라고 명명하며 그의 죽음을 확인해줬다. 대사관은 금요일(1971년 7월 9일)까지도 상황을 깨닫지 못했다. 그때는 이미 모리슨의 죽음이 언론을 타고 있을 때였다.’ - 1971년 8월 5일 『Rolling Stone』 


  모리슨 사망 후에도 도어즈 멤버들은 1971년 앨범 《Other Voices》와 1972년 앨범 《Full Circle》를 발매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모리슨 없는 도어즈가 흥행할 리 없었고, 결국 1973년 공식적으로 해체됐다. 모리슨의 콤비 만자렉은 솔로 음악가로 활동했지만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만자렉은 모리슨이 과거 썼던 스토리에 본인의 창작을 덧붙여 영화 『Love Her Madly』를 제작하는 등 모리슨 사후에도 그를 잊지 않았다. 

  모리슨은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모습으로 팬들을 사로잡았지만 어쩔 때는 한없이 진지했다. 평화를 외쳤지만 그 자신은 누구보다 폭력적이었다. 젊은이들의 우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도를 넘는 행동이 너무 많았다. 모리슨의 생각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는 정말 미친 사람이었을까. 적어도 본인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모리슨은 《L.A. Woman》을 작업할 당시 잡지 『Cream』의 기자에게 “저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저는 자유에 관심이 많습니다. 행운을 빕니다. J. 모리슨”이라고 편지를 보냈다. 모리슨 역시 여느 히피들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추구했고, 표현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모리슨은 광기로 유명하다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음악성과 사회성은 잊혀지곤 한다. 하지만 그는 1960년대 중후반 대세였던 히피의 지도자나 다름없었고, 그의 몽환적인 음악은 히피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1960년대 미국 젊은이들의 히피 문화를 이끈 장본인이 바로 모리슨이다. 모리슨이 사라진 1970년대 들어 히피 문화는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이후 젊은이들도 1960년대만큼의 파워를 보여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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