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의 아픔의 진원지 찾기
나는 이혼 직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오래 괴로웠다.
‘마음이 아프다’라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그 고통은 몸의 통증으로까지 번질 정도였다.
무엇보다 눈물이 너무 많이 났다.
어느 때는 이유도 없이 갑자기 터져 나왔다.
처음에는 분노라고 생각했다. 배신을 당했으니까.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세 번이나. 그래서 분노와 수치심의 눈물인가 생각했다.
그런데 분노와 수치심이라고 하기엔 눈물의 양이 너무 많았고, 기간도 길었다.
무엇보다 고통이 장기까지 관통하는 것처럼 깊고 컸다. 도대체 이 엄청난 눈물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른다는 사실이 가장 괴로웠다.
그래서 어느 날, 나는 생각했다.
원인을 알아야 이 눈물을 멈출 수 있겠다.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까지 아픈 건지 알고 싶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에게 물어봐야겠구나.
이든, 너 왜 우니?
너 어디가 그렇게 아프니?
지금 네 고통은 뭐니?
대체 뭘 해주면 좋겠니?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어?
마음속으로 물었다. 그런데 질문이 한꺼번에 몰려오거나, 뒤죽박죽 섞이거나, 금세 증발해 버렸다.
그러니 대답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 종이나 잡았다. 하필이면 2년 전 친구들과 일본 여행에서 사 온, 한지로 된 편지지 묶음이었다.
그건 원래 남편에게 주려고 산 선물이었다. 그는 필기구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좋아할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 종이는 여기저기 굴러다니다가, 그날 내 손에 들어왔다.
나는 거기에 썼다.
책을 쓰듯도 아니고, 편지를 쓰듯도 아니었다.
그냥 막 휘갈겨 썼다.
맞춤법도 없고, 띄어쓰기도 없고, 형식도 없었다.
감정의 변동이 너무 빨라서 글씨도 감정을 따라 휘갈겨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오른손 하나로만 쓰다 보니 생각이 천천히, 내 손글씨 속도에 맞춰 하나씩만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감정들이 다 할 말이 있는데, 이든이의 손끝에 도달하려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것처럼.
감정들이 줄을 서서 하나하나 나오는 느낌이었다.
아프다.
너무 괴롭다.
후회된다.
걱정된다.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못 버틸 것 같다.
그러다 문장이 바뀌었다.
왜?
그래서 나는 다시 물었다.
이든아, 너 뭐가 그렇게 슬프지?
그러자 대답이 나왔다.
몇 달 전의 내가 그리워.
우리가 여행 갔을 때가 그리워.
1년 전, 함께 있던 그 장소가 그리워.
아니… 내년에 우리가 휴가 갈 그곳이 그리워.
몇 년 후에, 아이들과 우리가 함께 있어야 할 그 미래가 그리워.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든아, 너는 지금 우리가 그립구나.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우리 넷이 함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그 모든 시간이 그립구나.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더 펑펑 울었다.
맞았기 때문이다.
내 고통의 정체는 분노나 수치심이 아니었다. 배신에 대한 분노와 수치심은 이미 그 아래에 묻혀 있었다.
내 눈물의 진짜 원인은 상실감이었다.
내 가정의 죽음.
앞으로도, 다시는 우리 넷의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이 내게는 그렇게도 큰 고통이었던 거다.
글을 쓰면서 나는 내 눈물의 진원지를 찾았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그래서 너는, 이든아.
너는 이 가정을 지키고 싶어?
남편이 돌아오길 바라?
대답은 명확했다.
아니.
나는 슬펐지만, 그가 돌아오길 바라지 않았다.
이미 내 가정은 죽었다.
그가 돌아온다고 해서 다시 살아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남아 있는 우리 셋까지 함께 가라앉을 것 같았다.
글을 쓰며 깨달은 게 하나 있다.
내가 남편을 바라보는 시선은 더 이상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아이들로부터 경계해야 할 위험 요소에 가까웠다.
그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지만 이미 폭력적이었고,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너무나 중독적이었다.
마치 문제 행동을 반복하다 결국 퇴학당하는 아이를 보듯,
연민은 있지만 더 이상 함께 갈 수는 없는 존재였다.
이 감정은 너무 복잡해서 글로 풀지 않았다면 나는 끝없이 혼란 속에 있었을 것이다.
겉으로 보면 나는 ‘배신당한 아내’다. 사랑을 잃고 분노하는 사람처럼 보였겠지.
하지만 내 눈물의 실체는 완전히 달랐다.
가정을 잃은 상실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돌아오길 바라지 않는 마음.
그를 나와 아이들의 노선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슬픈 결단.
아이들에게 예전의 가정을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
그리고 그 모든 선택을 내가 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
그 모든 것이 글 속에서 하나씩 분해되었다.
나는 남편을 미워하고만 있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됐다.
미안함도 있었고, 연민도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믿었던 것이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도, 비로소 인정할 수 있었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은 사실
혼자 남겨질 것에 대한 두려움,
비난받을 것에 대한 죄책감,
습관이 된 집착,
관계라는 이름의 강박이었다.
나는 거의 매일 글을 썼다. 일본에서 산 두꺼운 편지지 묶음을 하나 다 쓰고도 모자라 집에 있던 복사지까지 썼으니 말이다. 그리고 지금 쓰고 있는 이 글 역시, 그때의 기록을 더듬으며 쓰는 것이다.
그 모든 큰 그림이 글을 쓰는 동안 스스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알게 됐다.
감정을 끝까지 쓰다 보면, 그 끝에 답이 있다.
그 답은 누군가가 주는 게 아니라,
내가 나에게 도달하는 것이다.
목적은 하나다.
“내 눈물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
위로받으려고 쓰지 마라.
정리하려고도 쓰지 마라.
그저 왜 아픈지 알아내기 위해 써라.
다음은 내가 나에게 했던 질문이다.
너 왜 우니?
너 어디가 그렇게 아프니?
지금 네 고통의 이름은 뭐야? 슬픔이니, 분노니, 수치심이니, 불안이니?
그래서 내가 뭘 해주면 좋겠니?
이 일이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어?
질문을 쓰고, 대답을 깊게 생각하지 말고 바로 써라.
손으로 쓰면 생각은 반드시 한 줄씩 나온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차례차례 줄을 서기 시작한다.
감정의 속도를 강제로 늦추는 효과가 있다.
맞춤법, 문장, 논리 전부 필요 없다.
그냥 휘갈겨 써라.
아프다.
왜?
무엇이 그리운가?
그래서 나는 무엇을 잃었지?
그럼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이 과정에서 스스로 놀랄 만큼 정직한 답이 나온다.
답은 ‘쓰다 보면’ 나온다.
의식적으로 결론을 만들지 마라.
글이 끝나는 지점이 이미 당신의 답이다.
당신이 쓴 글은 작품이 아니다.
증거도 아니고, 기록도 아니다.
그저 당신의 생존 흔적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