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
대학에 입학하던 1996년 봄의 기억은 희미하다. 이것저것 수시로 잊는 통에 ‘만성 치매’라고 놀림 받던 나였으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캠퍼스에 지천으로 깔려있었을 여린 초록빛 새싹도, 하양 분홍 꽃도 봄비도, 거짓말처럼 기억이 없다. 대신 기억나는 건 너네들, 너희들, 우리들.
친구라고 하기에는 낯선데, 의지할 곳이라곤 서로밖에 없어 가벼운 눈인사에도 마음을 덥석 내주곤 했던 시절이었다.
우리의 첫 수업을 기억한다. 스타디엄 식 좌석인 큰 강당에서의 기독교 수업이었다. 누군들 아니었겠느냐마는, 나 또한 1학년 개강 첫날에는 모범생이었다. 집중해서 수업을 듣겠다는 마음에 단발머리 교수님의 눈높이, 정중앙에 자리 잡았다. 하필이면…. 새내기의 긴장이 무색하게, 어이없게도 첫 수업에서 졸았다. 앞뒤 좌우로 열심히 흔들흔들하다 눈앞에 번쩍(!)하는 불에 잠이 깼다. 이마가 왜 얼얼한지 상황 파악이 안 되었는데, 내 이마에 뒤통수를 맞은 네가 뒤돌아보더구나. 얼굴이 새빨개진 너에게 사과했는지는 기억이 없다. 만약 안 했다면, 지금이라도 미안하다.
1학년이면 누구나 들어야 했던 필수 교양영어 첫 수업의 기억은 강렬하다. 작은 체구의 멋쟁이 노교수님이 깜짝 놀랄 만큼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The Show Must Go On”을 읽어주셨다. 사회에 나가 직장인이 되고부터 그 글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저 혼자만 아는 힘든 상황에서 ‘가면’을 쓰고 울음을 참아가며 일해본 사람이라면(그래, 나와 너네들, 우리 모두), 누구든 가끔 그러지 않았을까 한다. 나는 살면서 그 문구를 꽤 자주 들여다본 듯하다. 특히 요 몇 년은 아예 꼬옥 품었다가 그 첫 수업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하는 글을 내 책 「나의 별로 가는 길」의 마지막 글로 담기까지 했단다, 채근인지 위로인지 서글픈 공감인지 모를 그 문구를 꼭꼭 씹어가며 읽어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려 마땅한데, 안타깝게도 그 첫 수업 외의 기억은 휘발되어 교수님의 성함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죄송하다.
한 학년 위였던 노수석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시작되어 여러모로 어지러웠던 1학년을 보내고 우리는 각자 정한 전공과목과 동아리로 흩어졌다. 시간은 둥실 잘도 흘렀고, 우리는 졸업하며 제각각 사회인이 되었다. 업계마다의 규칙에, 새로운 사람들에 익숙해지느라 바빠서였을까? 그 후로는 너희들과 ‘우리들’이라고 할 만큼 가깝게 지낸 기억은 없다. 대신 가끔이라도 보았던 봄, 여름, 가을과 겨울의 캠퍼스가 있었다. 찾을 때마다 변해가는 백양로를 거닐며 ‘내 청춘이 찬란했었지’, 하며 그 시절의 나를 그립게 떠올리곤 했다. 그런 산책에 왜 너희를 초대하지 않았느냐고?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때마다 이유가 있었던 듯하다. 가족 일이 힘에 부친다거나, 일터에서의 내 상황이 초라하다거나, 몸 건강이 안 좋았던 적도 있었거나 했다. 어느 날은 마음마저 무너져 꼴이 말이 아닌 날도 있었다. 물론, 좋지 않은 이유만 있는 게 아니었다. 좋은 일로 가득한 순간들도 있었다. 그럴 때는 어찌나 바쁘던지! ‘사람 노릇’이라는 게 해보니 그렇더구나. 좋은 일일수록 챙겨야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지? 그러니 너희에게 전하고픈 좋은 소식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미디어에나 올렸다. 너희들의 소식에는 ‘좋아요’를 망설이면서 내 포스팅에 달리는 ‘좋아요’는 세었단다. 그렇게 20여 년을 보내고 나니. 어느덧 ‘우리들’이라고 부르기에는 각자의 삶터 간의 간격이 너무 커졌더구나.
너희들은 어떤지 모르겠다만, 나는 작년에만 쉰을 갓 넘긴 사람의 본인상 부고를 두 번이나 전달받았다. 10년 넘어 20년 가까이 연락 한 번 안 하고 지내던 사람들의 본인상 소식에 슬픔보다는 당혹스러움이 앞서기도 했다. 영정 사진에 담긴 환한 웃음을 보니 그제야 눈물이 나왔단다. 돌아오는 길에는 ‘살아있었으면 안 봤을 사람을 죽었다고 만나고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섬뜩하게 미안했다. 그래도 다녀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던 건, 내 삶의 초점이 조금은 더 선명해져서였던 성싶다. 내 기억보다 환하게 웃는, 나만치 변한 그 얼굴에 우리가 각자 살아온 삶이 그렇게 다르지 않았겠다는 생각은 한참 후에나, 뒤늦게서야 했다.
생각이 많아진 김에 인생을 절반쯤 산 이 시점에 학교가 우리를 불러 모은 건 왜일까, 곱씹는다. 너희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자리를 생각하면 설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망설여진다. 어쩌면 대학교 1학년 첫 수업을 들으러 강의실에 들어서는 기분인 듯도 하다. 대학교 첫 수업이야 빼먹을 생각을 언감생심 못했다만, 이번 25주년 행사에는 갈지 말지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간다면, 가서 너희들을 만난다면, 너네들이 어느 자리에서 어떤 시간을 지나고 있든 반가울 것 같다. 너네들이 버텨온 시간, 걸어온 길을 다 알진 못해도 앞으로 우리가 걸어갈 길은 지금까지보다 훨씬 공통점이 많을 것 같다.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아마도 없을 거다. 그러니 그런저런 생각은 혼잣말로 삼키고, 대신 우리가 96년 봄, 캠퍼스에 놓고 온 희미한 청춘보다 지금 우리들의 눈주름과 듬성듬성 흰머리가 훨씬 찬란하다고, 인사할 테다.
<연세 졸업 25주년 재상봉 기념집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