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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장래 Aug 08. 2021

올림픽에서 배운 세상 마주하는 법

어쨌든, 우리는 경기장에 섰다.

8월 8일로 2020 도쿄 올림픽이 끝났다.

올림픽. 갓난쟁이 시절부터 치면 13번의 올림픽이 있었고 제대로 본 올림픽은 5번 정도 되는 것 같다.

(4년에 한 번 하는데 내가 52살이냐고? 동계올림픽을 잊지 마시라)


나는 올림픽 예찬론자다.

올림픽은 매번 같으면서도 다르다. 똑같은 배구 -땅에 떨어지기 전에 네트 밖으로 공을 넘기는 게임-여도 나온 선수가 다르다. 사람이 바뀌니 이야기도 새롭다. 58세의 탁구 선수 니 시안 리안의 스매시와 안산의 슛오프 10점은 각자의 빛깔을 띤다.

게다가 종목들이 좀 다른가. 선수의 몸을 보면 그의 삶이 보인다. 흔들림 없는 하체의 역도 선수, 탄탄한 팔 근육의 체조 선수 등등, 그들에게 같은 것이라고는 훅 올라오는 땀냄새뿐이다.

이토록 다채로운 올림픽 안에서 나는 인생을 배우곤 한다.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과거의 실수를 통해 배울 수 있기 때문이요, 문학을 읽는 까닭 중 하나는 등장인물을 통한 간접 경험에 있다.

나는 올림픽에서 위로, 열정, 눈물, 용기, 분노, 사랑....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웬만한 감정을 다 얻는다.

사랑 이야기, 이를테면 펜싱 오상욱 선수를 짝사랑하다가 여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3분 만에 접을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도 재밌겠지만 오늘의 주제는 세상 마주하는 법이다.


언니오빠 선수들을 바라보던 사춘기 학생에서 동생들을 응원하는 직장인이 되기까지 얻었던 교훈 중 2가지만 적어보도록 하겠다. 나중에 선수들이 딸, 아들의 나이가 되었을 때에도 깨달음이 있기를 바라며.


 


1. 실수해도 괜찮다. 포기만 마라.


"수업 시간에 떠들면 안 돼요."


선생님의 이 말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했던가.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은 속삭이는 소리만 나도 선생님께 이르는 투철한 준법정신을 보인다.

인생 10년 차를 넘어서면 융통성이 생긴다. 소음만 아니면 눈치만 주고 넘어가기도 하고 친구니까 봐주기도 한다.

성인은 좋게 표현해 말의 목적을 파악해 행동한다. 수업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니 그럼 나는 출석만 부르고 몰래 나가서 노래방이나 가면 되고, 동기들 표정이 안 좋으면 밥 한 번 사면서 달래고....


위의 예시에서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사람은 어릴수록 자신과 타인을 향한 잣대가 엄격하다.

내가 '뭐야, 올림픽인데 이렇게 못한다고?'라는 발칙한 생각을 한 것도 그래서다.

생후 100개월도 안 되었던 나에게 어른의 너그러움을 발휘해 달라는 호소이자 밑밥임을 밝힌다.




학창 시절 양궁 경기를 보다가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국가대표들만 모이는 양궁이라는데 다들 10점만 쏘는 게 아니었다.

심지어 7점도 나오는데 무슨 국가대표들이 이러냐 싶었다.

결국 한 선수가 9점을 몇 번 쏘고도 금메달을 가져갔다.

그 모습이 큰 위로가 됐다.

국가대표도 이렇게 실수를 한다, 그런데 나는? 학교에서 중간고사 몇 문제 틀릴 수도 있지 그게 뭐.


대부분의 학생들이 공감할 우리들의 학창시절은 이렇다.

나의 성실함이며 지식이 0부터 100 사이의 숫자로 표현된다. 등급, 등수는 냉정하게 나의 위치를 알린다.

자신감이 붙을래야 붙기 힘든 시기이다. 숫자는 내게 말을 걸곤 했다.

이게 네 등수야. 너의 위에 몇 명이 있는지 보이니? 그래, 공부야 했겠지. 네 위의 저 친구들보다는 아니지만.


흔들릴 때마다 나는 TV에서 보았던 금메달 선수의 과녁을 떠올렸다.

9점도 있고 8점도 있던 과녁판을 상기하다 보면 마음이 단단해졌다.

그래, 나 이번 시험은 좀 못 봤어. 근데 세계 1등도 그럴 때 있어.

인생이 어떻게 10점 연속이겠나. 포기만 말자. 기회는 온다.


지금 보면 이상한 비유였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축구 경기 90분 동안 그 어떤 실수도 없는 팀이 있던가. 

올림픽 경기를 보면, 중요한 건 그다음이었다. 실수에 마음이 크게 동요하는 사람은 새로운 실수를 만들어냈고, 자멸했다. 침착하게 다음 라운드를 노리는 선수는 결국 승리하곤 했다.

6점을 쏘길래 확실하게 졌다 싶었는데 상대도 실수를 한다. 다음 화살에서 10점을 쏴 역경을 극복한다.

14 대 12. 한 점만 내줘도 지는 상황이어도 15점을 먼저 내면 그만이다.

인생은 장기전이고, 마라톤 선수가 물병을 받느라 잠시 멈춘다고 탈락하지 않는다. 그러니 오늘 내가 만들어낸 실수에 아플 순 있어도 무너지지 말기를. 묵묵히 계속 쏘다 보면 기회는 온다.







2. 힘든 거 맞아. 그래서 어쩔 건데.


이런 싸가지없는 제목이 탄생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추억 보정 효과인지 어렸을 때 보던 경기에서는 실수에도 침착하게 대응하던 선수들이 모두 승리하곤 했다.

커서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올림픽은 길고, 경기는 많고.... 앞서 언급한 권선징악형 경기도 있기야 하지만 이게 올림픽 맞나 싶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승패가 기우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번 올림픽에서는 중국의 리웬웬 역도선수가 여기 해당했다. 압도적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설명하는 경기 같았다.)

기적이 일어나나 했던 기대가 이내 무참히 밟히는 경기도 많았다. 내가 트루먼은 아닌가 보다.


누군가 현저한 차이로 이겼다는 것은 그 선수가 그만큼 뼈를 깎는 노력을 했다는 뜻이다. 결코 공짜는 아니었을 것이다. 감탄하며 박수를 보내줘야 마땅하다.

하지만 나와 같은 보통의 사람은 어떤가. (적어도 우리 눈에 보이기에) 쉽게 1등 하는 사람보다 이렇게 애를 쓰는데도 4등을 하는 선수가 공감이 잘 된다. 그게 우리의 삶에 더 가까우니까 말이다.


내가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숙고해 보았다.

어떻게 하지. 방법이 없나.

곧 답이 나왔다. 방법은 없다. 그런데? 그래서 어쩔 건데.


배구로 예를 들어보자. 세계 랭킹 2위인 브라질에게 질 게 뻔하다. 실제로 예선에서 만나봤는데 어마 무시했다. 못 이길 것 같다. 그래서 뭐. 안 뛸 건가? 아니다. 어쨌든 이 경기는 치러져야 하고, 다가오고 있다. 


인생도 똑같다. 누가 봐도 가능성 없는 일이나 이겨내기에는 벅찬 사건이 터진다. 그래서 뭐.

상황이 왜 이렇게 됐는지 따지거나 주저앉아 눈을 감는 일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쨌든 이건 내 일이고, 다가오고 있다.


불공평한 일에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참으로 부조리하다.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인터넷 상에서 공격당하는 여성이 있고, 흑인이라는 이유로 범죄자라는 누명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잘못된 거 맞다. 그래서 뭐. 이게 현실이다.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니다. 바꿀 수 없는 일에 시선을 두지 말고 눈앞의 뭣 같은 현실을 똑바로 응시하라는 뜻이다. 고삼 시절 즐겨 들었던 '달리기'라는 노래에서 이를 운동에 잘 비유해 설명해주고 있다.


힘든가요 지쳤나요 숨이 턱까지 찼나요

할 수 없죠. 어차피 시작해 버린 것을.


경기는 시작돼 버렸다. 우리는 달려야 한다. 질 것 같더라도.

우리는 태어나 버렸다. 왜 나를 낳았냐고 엄마에게 투정 부리는 일은 불효 말고는 이루는 게 없다.

경기는 시작돼 버렸다. 우리는 달려야 한다. 질 것 같더라도.

다행히도 인생은 100m 달리기보다는 마라톤에 가까워서 스텝 한 번 잘못 밟는다고 실패하지 않는다. 

꼭 메달을 따야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든 완주만 해내면 된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올림픽을 치르고 있다. 우리들의 올림픽이 결승선을 통과했을 때 후회없는 경기였기를. 그게 인생의 금메달이지 뭐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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