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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장래 Sep 25. 2021

계란 프라이 먹어도 될까요?

진즉에 물어볼 걸!

웃긴 일들이야 많이 있었다.

버스 하차벨을 누르지 못해 목적지보다 한두 정거장씩 더 가서 내렸다든가

김치 더 달라는 말을 못 해서 좋게 말해 싱겁게 한 끼를 마무리했다든가 하는 일 말이다. 하하.

여기까지는 웃을 수 있었으나, 계란 프라이 사건은 그렇지 못했다.




된장찌개, 비빔밥, 소제지, 김치찌개, 김치, 김..... 계란 프라이와 어울리지 않는 음식을 찾는 게 더 빠를 것이다. 소박한 식사도 계란 프라이의 푸근한 노른자가 곁들여지는 순간 최고의 진미로 탈바꿈한다.


이걸 뻔히 아는데 내가 어떻게 참나.

밥을 먹을 때 떠올리는 계란 프라이는 목마르면 찾는 물만큼이나 당연하다.

어제저녁에 먹은 김치찌개가 오늘 아침 계란 프라이와 비벼져 새로운 식사가 되기를 나는 간절히 소망했다. 비극은 내가 그럴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순전히 엄마를 위해서였다. 엄마는 내가 계란 프라이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줄 알았다.

엄마는 내가 계란 프라이를 먹고 있으면 나와 기름 냄새가 난다며 몇 번이고 한숨을 쉬었다.

프라이팬을 살피며 제대로 닦지 않은 것 같다, 상한 것 같다는 내용의 말을 반복했다.

그 모습을 보고 '엄마는 내가 계란 프라이 하는 것을 싫어하는구나' 생각하는 건 논리적인 추론이 아니었을까.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다. 냉장고가 아름다운 이유는 계란이 있기 때문일 텐데... 

치이익, 치이이익. 나는 계란과 식용유가 프라이팬에서 만들어내는 그 협주를 몇 번이고 동경했다.






나의 배려는 믿을 수 없는 결말을 맞이 했다. '명란비빔밥 맛있게 먹는 법'을 두고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때였다.

"계란 프라이? 그냥 먹지 그랬어."

고민 따위 없는 시원한 대답. 자기는 상관없었단다. 동그랗게 뜬 눈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멍해졌다.

먹고 싶으면 먹으면 되지. 그 한 마디로 확인사살까지 당했다.

부정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나는 왜 계란 프라이 하나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삶을 살았나.

된장국에 계란 프라이 하나, 명란젓에 참기름 얹고 계란 프라이와 비벼 먹는 맛깔난 식사를 왜 포기했는가.


사람에게는 누구나 예전으로 돌아가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하는 순간들이 온다.

그냥 먹지 그랬어, 그 말 한마디가 나에게는 변화의 기점이었다.


주방을 지나며 가스레인지 앞에 올려져 있는 프라이팬을 볼 때마다 불완전했던 지난날의 식사를 떠올린다.

나는 원하는 식사를 하지 못해 불만족스러웠으며, 정작 배려의 대상인 엄마는 아무런 혜택도 얻지 못했다.

한 번 물어봤다면 끝날 일이었다.


그 뒤로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손님이 부탁하는 김치는 알바생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친구가 싫어하는 것이 단순히 계란 올린 까르보나라가 아니라 전 남자 친구를 떠올리게 하는 모든 행동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내 생각과 남이 말하는 진실이 다르다는 사실은 혼란을 가져왔다. 혼란이 분노를 가져오기도 했다.

상대방의 말보다 내가 분석하고 판단한 결론을 더 믿어서였다.

점차 분노는 다짐이 되어 내 안에 단단하게 자리 잡았다. 이 모든 과정에서 일등공신은 대화였다.


다른 이의 부탁 때문에 내가 불행해진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하나도 없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부탁을 받을 때의 심리적 부담보다 상대방에게 부탁을 해도 될까 망설일 때 오는 스트레스가 압도적으로 컸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마주하기로 했다.

타인의 눈치만 살피기보다 상황을 확실히 하기 위해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부탁을 했을 때 벌어질 미래를 맞히려 머리 굴리기보다 부탁을 하고 결과를 확인하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당연했던 일을 나는 이제야 결심했다.





사람의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습관인지 본성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전히 상대의 표정을 자주 살핀다.

하지만 곧 되뇐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물어보자. 지레짐작하지 않고 똑바로 상황을 바라보자.

사과든 후회든 그 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



문득 만나고 싶은 친구가 떠올랐다. 마침 내일 시간이 비었다.

망설였다. 당장 내일이고 지금은 오후 8시야. 당연히 안 되겠지? 이거 실례 아닌가?

옛날이라면 아, 다음부터는 내가 언제쯤 사람을 만나고 싶은 지 파악한 후에 미리 연락해서 날짜 잡아야지.라고 다짐했을 것이다. (그게 어디 쉬운가. 내가 언제 사람을 만나고 싶을지 어떻게 아냔 말이다.)


계란 프라이를 떠올렸다. 그동안 먹지 못한 계란 프라이는 탑처럼 쌓여 있었다. 친구에게 연락했다.

"내일 혹시 시간 돼?"

"내일? 되게 빠르네ㅋㅋㅋㅋ 응 돼."

우리는 16시간 후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안 되면 뭐 어떤가. 다음에 날짜를 잡으면 되지. 적어도 내가 너를 항상 생각하고 있다는 어필 정도는 되지 않는가.


'나'는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내 요구 하나로 상대의 기분을 잡치게 할 수 있을 만큼 영향력 있는 인물이 아니며 그렇다고 상대방의 속마음을 완벽하게 꿰뚫어 보는 능력자도 아니다.



오늘도 프라이팬 앞에 서서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계란 프라이 할 건데 하나 먹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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