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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장래 Apr 30. 2022

라면 먹고 갈래?( ͡° ͜ʖ ͡°)

라면 먹고 갈래? 이렇게 속보이는 질문이라니. 괜히 장난기가 발동한다. 못 알아듣는 척하며 아니? 나 야식 안 먹는데? 하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라면 먹고 가라는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는 모두 안다. 늦은 시각에 이야기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래, 먹고 가지 뭐, 하고 대답하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이 집 김치가 맛있으니 신라면이랑 먹으면 딱이겠다는 생각에 막차를 버리지는 않는다. 너와 함께 밤을 보내고 싶어, 이참에 진도를 빼고 싶어, 라고 대놓고 말하기는 거시기 하니 우리는 괜히 라면 타령을 한다.


요즘은 ‘라면 먹고 갈래’ 대신 ‘넷플릭스 보고 갈래’가 연인들 사이의 암구호라고 들었다. 라면도 넷플릭스도 없었던 시절에는 어떤 말이 유행이었을지 괜히 궁금해진다. 짚신 꼬고 갈래, 레코드 한 판 듣고 갈래, 이런 식이었으려나.

애초에 라면인지 짚신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노골적이지 않게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깜찍한 핑계이기만 하면 된다. 하다못해 강아지 간식 구경하고 갈래(상대는 강아지를 기르지도 않았다) 같이 어처구니없는 질문이어도 상관없다. 뜨거운 마음만 통한다면 뜨거운 밤도 성사된다.






치치는 모르고 있겠지만 재영이네 치와와인 그는 돌려 말하기 키워드로 이곳저곳에서 많이 등장했다. 재영이가 남자 친구인 종현 오빠와 사귀기 전, 간식 타령을 하며 가까워질 때도 그랬고 내가 재영이를 만나고 싶을 때도 그랬다. 고민이 생겼어. 털어놓을 사람이 필요한데 마침 동네 친구인 네가 딱이니 시간 좀 내줄래. 이렇게 말하기는 쑥쓰러웠다. 그래서 우리는 늘 치치 핑계를 댔다. 강아지 산책에 로망이 있다며 괜히 함께 간다던가, 치치가 다양한 사람을 만나보아야 사회화가 된다는 핑계로 나를 불러낸다던가 하는 식이었다.


평일에 가볍게 만날 수 있는 동네 친구는 돈 주고도 못 사는 소중한 존재다. 그 동네 친구가 학창 시절부터 친구라면 더더욱 그렇다. 우리는 서로의 민망한 과거와 모난 부분들을 알고 있었다. 나는 재영이의 전남친들을 알고 재영이는 교감선생님과도 맞서 싸우던 혈기 넘치는 시절의 나를 안다. 그러니 상대의 행동에 쉽게 납득이 간다.


서로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본론을 꺼내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치치 핑계로 만나서는 산책로를 걸으며 저 강아지 귀엽다, 언제 이렇게 꽃이 폈지 같은 소리로 분위기를 서서히 끌어올린다. 치치가 헥헥대며 쉬고 싶어하면 근처 벤치에 앉아 그제야 진짜 이야기를 시작했다. 탁 트인 한강, 시원한 강바람, 품 안에서 느껴지는 치치의 따끈한 몸. 여기에 속마음을 꺼내 보일 수 있는 친구까지 옆에 있다니 이만하면 천국이다.


한번은 연애 문제로 재영이를 불러 산책을 했다. 당시 연인과 연락하는 일이 족쇄처럼 느껴지던 차였다. 재영이는 자신의 일처럼 진지하게 고민해줬다. 비슷한 일이 있었을 때 자신은 어떻게 느꼈는지, 그때 봤던 유튜브에서는 어떤 말을 건네주었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러다가 그 일은 진짜로 본인의 일이 되어버렸다. 아무래도 나 종현 오빠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대화의 결론은 갑자기 그렇게 났다.

재영이는 다음 날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 놀라운 추진력이었다. 치치 간식으로 맺어진 인연은 그렇게 치치 산책으로 끝이 났다.




가만히 살펴보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치치가 있다. 쑥쓰러울 때 괜히 들이밀 수 있는 무언가 말이다. 엄마의 경우 그게 영화였다. 엄마는 종종 영화를 틀어놓고는 나를 불러 이 영화 봤느냐고 물었다. 안 봤다고 하면 같이 보자고 하고, 시간이 없다고 하면 5분만 쉬면서 보라고 했다.


참 싫었다. 서로 영화 취향도 다를 뿐더러(잔잔한 일본 영화는 결코 내 취향이 아니다) 영화를 한 편 보고 나면 2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직장인에게 저녁 이후 2시간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 굳이 설명해야 할까. 더구나 나는 쉴 때도 ‘쉬는 시간에 해야 할 일 목록’대로 살아야 마음이 편한 극계획형 인간이었다. 갑자기 그런 식으로 저녁 일정을 추가하면 견딜 수가 없었다.


엄마가 좋아하는 것은 영화 자체라기보다 딸과 함께하는 시간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앉아서 멍청하게 화면을 쳐다보는 일에 그렇게 큰 의미가 담겨 있을 줄이야. 엄마는 그냥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것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했다. 영화를 보며 이해할 수 없는 전개를 두고 욕하고, 짧게나마 한 줄 평을 공유 하는 일이 좋았던 것이다. 친구와 함께하는 평일 저녁의 산책은 그렇게 좋아했으면서 엄마와 보는 평일 저녁의 영화는 하루를 망치는 파괴범으로 여겼었다. 살짝 미안해졌다.


엄마 미안해, 미처 몰랐어,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너무 소홀했다고 고백기에는 아무래도 부끄럽다. 나에게도 치치가 필요한 순간이다. 배우들 얼굴이라도 흥미진진하면 보겠다고 엄마와 협상했다. 부디 이번 영화는 잔잔함 속에 반전이 있기를. 평범한 직장인인데 갑자기 초능력이 생기는 막장이어도 좋고. 단조로운 음악으로 영화가 시작하는 가운데 조심스럽게 소원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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