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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장래 Apr 16. 2022

안녕하세요 신데렐라입니다

내 별명은 신데렐라다. 나를 처음 본 사람들은 의아할 수 있다. 인정한다. 왕자가 하룻밤 만에 반했다고 납득하기는 어려운 외모다. 청소를 꼼꼼하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요정 대모님 같은 든든한 백도 없다. 그럼에도 신데렐라로 불리는 이유는 12시라는 시간 때문이다. 나에게 12시는 중요한 시간이다.

  

대학생 시절, 우리 집 통금 시간은 12시였다. 성인에게 통금이라니. 동의할 수 없었지만 K-장녀는 불만이 가득한 와중에도 착실하게 시간을 지켰다. 친구와 놀다가도, 공부를 하다가도 11시면 짐을 싸기 시작했다. 신데렐라는 12시 전에 궁전에서 나오기만 하면 됐지만 나는 그 시간까지 집에 도착해야 했으므로 어떻게 보면 신데렐라보다 조건이 가혹했다.

클럽에 갔던 그 날도 12시 무사귀가를 위해 몸을 일으켰다. 나가려는데 왕덩치 양복맨들이 나를 막아서는 게 아닌가. 공짜로 들어왔으니 새벽 2시까지는 퇴장이 안 된단다. 시간은 11시 반이 되어가고, 양복맨들은 몸의 두께감이 상당했다. 머리는 안 돌아가는데 절박함만 가득했던 기억이 난다. 무료로 입장 시켜준 담당자의 이름을 대고, 놀고 있던 동기들이 모두 불려오고... 난리법석 끝에 집에 갈 수 있었다. 이 롹배배(들여보내줬다던 담당자 이름이다)사건 덕분에 자타공인 신데렐라가 되었다.




밤 12시 뿐만 아니라 낮 12시도 신경 써야 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오후에 커피를 마실 수 없었다. 저녁에 커피를 마시려면 다음 날 아침을 날릴 각오를 하고 마셔야 했다. 몸에 카페인이 돌면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린다는 느낌이 올 정도로 격하게 쿵쾅거리는 통에 잘 수가 없었다. 커피 맛집이라는 유혹에 넘어가서 아인슈페너를 홀짝여보다가도 하룻밤을 멍하게 보내고 나면 다음부터는 이를 갈고 커피를 멀리하게 된다. 낮 12시마저 신경쓰는 나를 보고 친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는 찐으로 신데렐라다.


콜드브루 맛집에 와서 루이보스를 시켜야 하는 처지가 억울해서였을까. 괜히 커피가 미워졌다. 커피는 못생겼어. 저 시커멓고 탁한 모습 좀 봐. 커피 원가는 사실 200원이래. 그걸 몇 천원이나 주고 사 먹다니 다들 호구야 호구.

커피의 신포도화가 끝난 뒤로 커피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대신 차와 사랑에 빠졌다. 차는 여러모로 훌륭했다. 건강에도 좋고 살도 안 찌고. 한적한 저녁에 혼자 차 한 잔을 마시며 생각에 잠겨 있으면 헤밍웨이라도 된 것 같았다. 평생 차만 마시며 사는 삶은 꽤나 근사했다.


얼그레이에도 카페인이 들어 있다는 알게 된 그 날, 헤밍웨이 키즈의 꿈은 박살났다. 어쩐지 사람을 만나고 오기만 하면 잠이 안 온다 싶었다. 기분 좋은 설렘 때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심장의 경보였던 것이다. 이제 내게 남은 차는 페퍼민트와 루이보스밖에 없었다. 이럴 수가. 선택지가 적어도 너무 적었다.


얼그레이의 배신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나는 카페에만 가면 친구들에게 하소연했다. 이거 봐. 메뉴판의 절반 이상을 커피가 차지하고 있는 거 보여? 차는 요만큼, 여기 티백 4개 중에 하나야. 여기서 얼그레이는 카페인 때문에 못 마시고, 캐모마일은 맛이 없고. 그럼 두 개밖에 안 남아. 루이보스랑 페퍼민트를 번갈아가면서 마셔야 한다고.

친구들은 그다지 공감해주지 않았다. 그러면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면 되잖아. 뭐가 문제야. 그들은 커피라는 단어 자체가 문제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커피라는 두 글자가 왜 이리도 거부감이 들던지. 디카페인 카페라테를 입에 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고정관념이 이렇게 무섭다. 애완 뱀은 어릴 때 입을 묶어놓아서 성체가 돼도 혼자 입을 벌릴 줄 모른다고 한다. 얇은 밧줄에 묶여 있어도 도망치지 않는 서커스단 코끼리나 1m밖에 뛰지 못하는 벼룩도 비슷한 방법으로 탄생한다.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디카페인 커피를 마셔도 된다는 사실을 알지만 왠지 그러면 안 될 것만 같았다.



통금없는 생활도 비슷한 상황이다. 통금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존재했다. 12시가 지나 들어온 날이면 말다툼을 했는데 내용이 지겹도록 똑같았다. 엄마가 늦었다며 꾸짖으면 내가 다 큰 직장인을 통제하려 드는 태도를 견디지 못하고 화를 낸다. 늦게 들어오든 안 들어오든 내 맘이고 사람이 섹스를 꼭 밤에만 하는 건 아니야. 맘만 먹으면 낮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모텔에 대실도 있는 거 몰라? 엄마가 이러는 거 아무 의미 없어.

엄마도 덩달아 성을 낸다. 그게 엄마한테 할 소리야? 세상이 하도 위험하니까 걱정해서 하는 말 아니야. 그럴 거면 나가 살아. 이 집에 살면서 네 멋대로 굴지 마.


반복되는 싸움에 서로가 질려갔다. 하지만 나의 경우 반 오십이나 되어서 통금에 메여 사는 게 더 큰 문제였다. 11시만 되면 집에 가야 한다고 전전긍긍하는 직장인이라니 너무 구리지 않은가.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내게는 친구와 시간 걱정 없이 수다를 떨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첫 차든 막차든 원하는 지하철을 탈 수 있어야 했다.


협상이 결렬됐으니 몸으로 부딪히는 수밖에 없었다. 알아서 늦게 들어가기 시작했다. 친구네 집에서 잘 거라고 통보하고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 날이면 앞에 적어둔 레퍼토리대로 싸웠다. 무단 외박을 하고 들어온 어느 날, 엄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자유를 얻었다.


자유이긴 했으나 이는 반쪽짜리였다. 여전히 11시 즈음이면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당당하게 늦을 거라고 대답하지만 이미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다. 아무렇지 않으려 하지만 그걸 노력한다는 것부터가 신경을 쓰고 있다는 뜻이다. 젠장, 이놈의 모범생 기질이란.



한번 머릿속에 박힌 생각이 바뀌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릴까. 더 이상 통금이 없음에도 친구들은 밤만 되면 내 걱정을 해준다. 이제 카페에 가서 시계를 보지 않지만 나는 여전히 신데렐라로 통한다. 편안한 마음으로 친구네 집에서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는 날은 언제쯤 올까. 오늘도 불편한 마음을 안고 아인슈페너를 마시며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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