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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장래 May 13. 2023

엄마는 일부러 밥을 태우신 걸까

집안이 매캐한 연기로 가득하다. 검은색 구름이 또렷한 모습으로 거실을 떠다니고 있었다. 공기에도 색을 입힐 수 있는지 그날 처음 알았다. 압력밥솥에 불을 올려둔 채 한눈을 팔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가스레인지로 달려가며 어쩐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샤워 한 번 했을 뿐이다. 한나절 집을 비운 것도 아닌데 그 사이에 이렇게 불나기 일보직전이 되어버리는 건 너무했다. 밥솥을 열어보니 바짝 마른 쌀들이 타원 형태만 간신히 갖추고 있었다. 시커먼 모양새가 선사유적지에서 발견됐다는 몇 천 년 전의 쌀 사진과 비슷했다.





숯이 되어버린 쌀들을 긁어내다 말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큰 사고를 쳤다. 집을 화재 영화 세트장 비슷하게 만들었으면 놀라고 당황할 법도 하다. 이상하게도 마음은 평온했다.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게 사이코패스 성향이 있거나 위험감지 능력이 떨어지는 걸까. 책임감을 가지자, 성숙해지자, 되뇌다가 깨달았다. 당장 지난주에도 비슷한 광경을 마주한 적이 있다. 한 달 전에도 마찬가지다. 엄마 덕분에 이런 쪽으로는 조기 교육이 끝난 것이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밥이 다 타버렸네.”

“맛이 많이 이상해? 냉장고에 있길래 한 번 넣어봤는데...”



엄마는 무언가를 자주 태우곤 했다. 이유도 다양했다. 통화를 하다 타이밍을 놓쳐서, 깜빡 잠이 들어서... 위기탈출 넘버원에는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있는데 다 우리 엄마 같은 사람들이 제공하는 것이다.





그뿐인가. 엄마는 조리와 요리에 차이를 두지 않았다. 생물학적으로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미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음식이 다르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국으로 시작해 조림이 되어버린 야채 요리까지는 실수라 여기고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냉동실 비우기라는 명분하에 몽땅 때려 넣은 식재료들의 불협화음은 견디기 힘들었다. 짠 주제에 비린내까지 올라오는 김치찌개를 며칠간 먹던 기억을 떠올리자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몰래 버리면 될 걸 그걸 꾸역꾸역 먹은 우리도 참 바보다).





가족들이 참다못해 항의를 할 때면 엄마는 머쓱해하며 웃어넘겼다. 우리의 불만과 엄마의 요리솜씨는 딱히 비례하지 않았다. 우리는 타인을 바꿀 수 없다. 오직 자신만을 변화시킬 수 있을 뿐. 소중한 깨달음을 체득한 가족 구성원들은 조용히 생존요리의 기술을 익혔다. 아빠는 두부김치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나는 계란프라이와 스팸을 굽는 요령이 늘어갔다.





엄마가 터키로 여행을 갔다. 집을 재난현장으로 만드는 주범은 내가 되었다. 밥을 태운 그날, 엄마의 여러 요리들이 떠올랐다. 제때 냉장보관하지 않아 쉰내가 나던 고사리, 건강식품이라고 사놓고는 냉동실 생활만 몇 년 하다가 아무 음식에서나 등장하기 시작한 강황... 불행한 한 끼들이었다. 대신 다른 쪽 지혜를 얻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가짐, 실수하더라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담대함 같은 것들 말이다.





이 모든 상황은 엄마의 큰 그림일까? 9개월의 숙성기간을 거쳐 냉동고 향이 가득 배인 갈치를 씹으며(그 와중에 고추장을 너무 많이 써서 간이 맞지도 않았다) 엄마에게 의심반 존경반의 눈길을 보냈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당당하게 도전하는 자세를 삶에서 실천해 보이는 엄마를 둔 것은 귀중한 행운이었다.






 





밥 태우는 엄마를 둔 딸은 체육관에 도착해서야 호루라기를 떠올리는 선생님으로 자랐다. 난이도 조절에 실패해 수업을 망치는 일도 꽤 있다. 위신이 떨어지는 일지만 탄 밥을 먹고 큰 아이는 당황하지 않는다. 이건 기회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전파할 수 있는 생생한 교육 기회.





우리 반 아이들이 실패에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어른으로 자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께서 농구 자유투 시범에 실패해 놓고는 의연하셨던 걸 지켜본 덕이구나! 하는 걸 바라지는 않는다. 아이들이 인생에서 마주하는 시련들을 꿋꿋하게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욕심만 조금 있다. 너희도 나도 ‘실패해도 안 죽어’라는 생각으로 삶을 살아낼 수 있길 바란다.



*표지 사진은 다음 블로그에서 가져왔습니다

https://emeng.tistory.com/entry/%ED%83%84-%EB%83%84%EB%B9%84-%ED%83%9C%EC%9A%B4-%EC%86%A5-%EA%B9%A8%EB%81%97%ED%95%98%EA%B2%8C-%EC%84%B8%EC%B2%99%ED%95%98%EB%8A%94-%EB%B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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