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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장래 May 05. 2023

선생님 저한테 잘 안 해주셔도 돼요

그러니까 받아주세요

⌜… 용돈을 다 썼다. 슬프다.⌟

준성이의 일기를 읽다가 탄식했다. 달 말까지 시간이 좀 남았다. 벌써 용돈을 모두 쓰다니 자제력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아무래도 한 줄 코멘트는 걱정을 빙자한 잔소리를 적어야겠다. 준성아, 대체 어디에 돈을 그렇게 낭비했니. 펜에 할 말을 장착하며 찬찬히 일기를 읽어 내렸다.




일기의 내용을 요약하자면(애초에 6줄밖에 없었지만) 이랬다.

⌜친구가 돈이 없대서 아이스크림을 사줬다. 놀이터에서 먹다가 흘렸다. 다이소에 가서 물티슈를 샀다. 용돈을 다 썼다. 슬프다.⌟




돈도 없는 마당에 친구에게 음식을 사줬다. 청소를 위해 물티슈를 사서 전재산을 거덜 냈다.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일부터 없었을 것이다. 밥도 아니고 재미로 먹는 간식을 돈도 없는 마당에 내주는 일은 오지랖이다. 땅바닥에 뭔가를 흘렸다고 치운 적도 딱히 없는 것 같다. 어렸을 적에는 주워 먹을지를 고민했었고 커서도 음식을 버려서 안타까워하기만 했을 뿐 그 이상의 성숙한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나는 따뜻한 마음씨도 시민의식도 없는 사람이었다. 아홉 살보다 못한 내 상태에 부끄러워졌다.







      





“선생님, 이거 드세요.”

재은이는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내게 캔커피를 내밀었다. 고맙지만 감동하기에는 너무 자주 있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종종 교회에서 나눠준 건빵이나(사탕은 안 준다) 처치 곤란인 물건들(물티슈나 실컷 가지고 논 딱지)을 내게 넘기곤 했다. 권태에 찬 아이돌처럼 안면근육으로만 대강 미안하다는 표정을 만들어내며 대답했다.




"재은아, 선물은 참 고마워. 아쉽지만 선생님은 이 커피를 받을 수가 없어."

"네? 왜요?"

"재은이한테 이런 선물을 받으면 선생님이 재은이를 예뻐하게 되겠지? 선생님도 모르게 재은이한테만 더 잘해주게 될지도 몰라. 그럼 다른 친구들이 차별이라고 느끼지 않을까? 선생님은 공평한 사람이어야 해서 그 선물을 받을 수가 없어."

“...”




김영란 법 운운할 수 없으니 나름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 설명이었다. 효과가 있었는지 재은이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자리로 들어갔다, 라고 착각했다. 무심한 선생님은 오늘까지 제출해야 하는 서류를 점검하기에 바빴다. 재은이가 다시 나와서 말을 걸 때까지 아무것도 몰랐다.




“선생님, 저한테 잘 안 해주셔도 돼요. 그러니까 받아주세요.”

독립운동가를 방불케 하는 결연한 눈빛,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각오... 그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 너 이거 돈 주고 사 왔니?”     

재은이는 살짝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 앞의 무인 가게에서 사 왔는데 그게 마지막 용돈이었다고 한다. 상대방의 기쁨을 위해 자신의 전재산을 털어넣다니. 다시 한번 반성 모드에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나는 남들에게 선물을 줄 때 어떻게 했더라. 확실하지 않으면 함부로 선물하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인지, 아메리카노파인지 카라멜 마끼야토파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사나. 주고받은 선물 목록을 확인하고는 비슷한 가격대의 물건 중에서 고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선물을 아무 때나 주는 것도 안 될 일이었다. 상대방도 내 통장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우리 반 아이들은 돈을 쉽게 쓰는 경향이 있다. 9살 애들답게 극단적이고 즉흥적이다. 뒷일을 고려하지 않는다. 어른스러운 사람은 중도적이고 신중한 사람일까. 지금까지 그렇다고 여겼고, 그리 살려고 해 왔다. 내일을 위해 아끼고 조심하고 계산하는 살기 위해 노력했다. 잘해왔다고 여겼는데 마음 한구석이 찝찝해졌다. 바닥에 음식을 흘렸을 때, 친구 생일 선물을 고를 때 조금은 너희 생각이 날 것 같다. 너희에게 옮는 게 낭비벽이 아니라 아낌없는 사랑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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