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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장래 Feb 09. 2023

고생을 사서 하는 이유

라오스 루앙프라방-푸시 산에서 내려다본 풍경을 소개하고 싶다. 그곳은 멋들어진 곡도로 굽은 강이 있었고 연둣빛 풀들이 그 옆에서 함께 반짝였다. 파스텔톤의 그 정경이 너무 소중해서 나는 오래도록 쉼터에 앉아 메콩강을 내려다보았다.



강 위에는 나무다리가 있었다. 그 다리는 끝내줬다. 공업용품 특유의 직선적 딱딱함이 없었다. 적당한 세월을 맞은 목재의 질감이 정겨움과 고즈넉함을 더해주었다.

저 다리에 가 봐야겠어.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다리의 모습에 나는 홀린 듯 선언했다. 나무다리를 거닐며 그 위에서 메콩 강의 연두연두한 아름다움을 온몸 가득 묻히고 싶었다. 부모님과 딸이라는 3인 여행 단체에서 가이드는 나였다. 딱히 말릴 사람은 없었다. 구글 지도에서 사진과 후기를 뒤진 끝에 다리 이름을 알아냈고 뚝뚝을 타고 Old french bridge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 우리는 다리 앞에 도착해서 할 말을 잃었다. 멋져서는 아니었다. 가까이서 본 다리는 크고 높았다. 무엇보다도 굉장히 자연적이었다... 제대로 된 안전장치가 없었다. 철골 뼈대 위에 나무판자를 대강 얹어놓은 다리는 오토바이가 지나갈 때마다 덜컹거렸다. 인공물이 자연과 잘 어울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 와중에 다리를 걸어서 건너려면 가장 끝 쪽을 이용해야만 했다.  허리까지 오는 쇠그물 한 겹, 얇은 두께의 나무판자 한 층이 전부인 곳이었다.



나무판자는 어딘가 엉성하게 붙어 있었다. 틈으로 메콩강의 둔탁한 초록빛 물이 훤히 보였으며 무게중심을 옮길 때마다 바닥이 삐걱삐걱 흔들렸다. 뚝뚝 비용이 아깝다고 굳이 다리를 건넌 것을 후회하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옮겼다. 라오스 하면 떠오르는 기억이다. 라오스 어땠어, 하면 강바닥에 몸이 부딪혀 죽을 것만 같았던 그 순간으로 가버리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다른 여행도 비슷하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제일 또렷하게 기억난다. 이래서 젊어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고 한 걸까. 애들도 비슷하다. 착한 애, 똑똑한 애도 있었는데 정작 가장 먼저 생각나는 애들은 날 지독히도 힘들게 했던 아이들이다.






정우는 호불호가 확실한 학생이었다. 공룡을 참 좋아했다. 미래의 내 모습을 그리라고 해도 공룡을 그렸고(정우는 공룡학자가 되고 싶구나!) 우리 반에서 기억에 남는 일을 그리라고 해도 공룡이 등장했다(정우는 공룡 그렸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구나!). 수학이나 국어시간에도 그랬다. 할 일을 끝내지 않으면 넌 집에 갈 수 없어. 내 선언에 정우는 울먹이는 눈을 하면서도 입을 굳게 다물었다. 5분 뒤면 다시 공룡을 그렸다.


수학 과외 선생님 딸로 자란 나로서는 납득할 수 없었다. 열 살인데 아직도 8 더하기 9를 손가락으로 해낸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나는 매일 수업이 끝나면 정우를 데리고 수학 보충 수업을 했다. 무슨 에너지였는지 모르겠다.



걔가 나나 참 독했다. 정우는 구구단을 외지 못해 울었고, 손가락 덧셈이 막히면 학습지를 구겨서 집어던지곤 했다. 나는 집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정우에게 벌을 줬다. (동의해 주신 보호자님께 새삼 감사드린다)     

늦가을의 어느 날, 정우는 87 곱하기 59를 해냈다. 눈물이 찔끔 났다. 정우가 너무 장하고 대견하고 기특했다. 그 감격의 순간, 빨리 집에 보내달라면서 성질을 내는 정우에게 한 소리 하느라고 제대로 칭찬을 못해준 건 살짝 아쉽다.




급식실에서 가끔 정우를 마주친다. 정우는 나를 모르는 척한다. 아랑곳하지 않고 인사를 건넨다.

정우야, 잘 지내지?

정우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네, 하고 지나가버린다. 놀랍지 않다. 정우가 선생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라고 했다면 난 그 아이 속에 외계인이라도 기생하나 의심했을 것이다.




별로 널 두 번 만나고 싶지는 않다. 급식실에서 우연하고도 애틋하게 만나는 걸로 충분하다. 그런데도 막상 그해 아이들을 떠올리자면 네가 가장 먼저 등장한다. 어디 그뿐일까. 공룡을 볼 때, 제법 매워진 가을바람을 맞을 때면 67 곱하기 34를 가지고 티격태격하던 그날의 교실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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