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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익 Jul 14. 2023

핵심감정은 '시달림‘입니다.

원가족부터 지금까지 흐르고 있는 내 삶의 빌런



나는 어린 시절 아빠와 엄마의 잦은 갈등으로 인해 참 많이 시달렸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가정 불화’였다. 어린아이는 관찰한 것을 엉뚱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나도 마찬가지로 존재의 무가치와 무능력에 관한 신념들을 만들어냈다. ‘나만 아니었으면… 우리 엄마아빠가 이렇게 힘들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애야. 나는 부끄러운 존재야.’ 그래서인지, 어린 시절의 기억이 회색이다. 생기 없는 집의 분위기가 더 생생하다. 어쩌다 가끔 좋은 날들도 있었다는 걸 알지만, 팩트는 바뀌지 않는다. 내가 불안했었다는 것. 이런 유년기 정서는 성인이 되어, 공동체와 가정을 통해 많이 회복되고 치유되었지만, 가끔씩 내가. 아주 괜찮지는 않다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듯 터져버릴 때가 있다. 오늘은 그 내 삶의 빌런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어린 시절에 엄마와 나는 하나였고, 아버지는 적이었다. 나에게 아빠는 엄마를 통제하고 불편하게 하는 사람, 아버지는 불안이 높아 엄마의 자유를 빼앗는 사람이었다. 아빠와 엄마가 싸울 때면 나는 엄마 편에서 서서 아버지와 맞섰고, 미워했다. 자기의 존재의 근원인 아버지를 미워하며 자란 아이는 어떻게 클까? 알게 모르게 자리 잡은 수치심, 잘해야만 하는 당위와  여럿 결심들을 가지며 살아왔다. 나의 존재의 부끄러움을 씻어내기 위해. 학교에서는 조용히, 혼나지 않으려고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범생이었고, 외갓집에 가서는 ‘여기서는 우리 아빠가 미움받겠지. 엄마아빠 싸우는 거 다 알고 계시겠지. 나를 불쌍하게 보겠지. 부끄럽다.’ 생각하며 당당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와서 동네가 시끄러워지는 날에는 ‘나는 시집 다 갔다. 이제 알만한 사람은 다 알 텐데.’ 어디서 주워들은 어른들의 말로, 아빠의 어떠함 때문에 내가 부적절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었다.


이렇게 질기도록 싸우고, 딱히 화해하는 과정을 본 것 없이 지내다가 또 싸우고 싸우고, 그렇게 보내다 보니 나의 핵심감정은 시달림이다. “지겹다. 지겨워.” 말버릇, 그러니 굳이 열심히 살고 싶지도 않고, 살아남고 싶지도 않다. 우울함이 잔잔하게 깔려있었던 나는 단 한 번도 태어나서 감사한 적도 없고, 대학생 때는 ‘죽어도 아쉬울 게 없다.’는 말을 해서 친구를 놀라게 했다. 사는 게 지겹고, 버거우니까 차라리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계산에서 나온 말인 것 같다. 태생이 낙천덩어리 었던 같은 반 친구는‘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무섭게 하냐.’라고 했는데, 그때 ‘아, 이 말은 내가 하기에 부적합한 말이구나. 공감받기 어려운 거였구나.’ 알아차렸다. 한 번은 남자친구(현 남편)랑 영화 ‘그래비티‘ -(우주에서 생존하는 이야기)를 보고 나서 ’ 주인공은 왜 저렇게 까지 살려고 할까? 나 같으면 진작에 포기했을 거 같아. 우주에서 하나의 점으로.‘ 했다가 아직까지도 그때 이야기가 회자되는 오점을 남겼다. 그래 그때는 사는 게 ’ 굳이‘ 였던 시절이었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내 주위에서 난리가 나는 상황이다 보니, 원치 않게 고통과 스트레스를 매일매일 마주했다. 살얼음판 같은 불안함 속에서. 아버지가 집에 없는 날이 편하고 좋았다. 아버지가 퇴근 후 술 안 마시고 집으로 바로 오면 좋겠다가도(술 마시면 시끄러워지니까), 술을 마셔도 좋으니 늦게 왔으면 좋겠는(없으면 편하니까) 마음을 오갔다. 조금 더 자란 고등학생 때는 청소년기의 특징인 ‘이상적인 기준’을 가지고, 아버지에게 날카로운 말들을 뱉었다. 아버지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면 한심하게 보면서 가르치려 들었다. 그래서 바락바락 대들고, 싸우는 것도 꽤나 잘하던 딸이었다. 아무래도 살아남기 위한 깡다구, 야성(野性), 내 목소리를 지르는 감각은 그때 길러진 듯하다.



다행히도, 남편을 만나서 꿈꾸는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꿈의 독립이었다. 내 가정으로 분리되는 것, 그리고 더 나은 가정을 만드는 것이 내 인생에서 꼭 해야 하는 일, 그러니까  가정이 정말로 좋은 곳이라면, 하나님이 만드신 원래 목적이 가정을 통해 이뤄진다면 그게 무엇인지 몰라도 엄청 좋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최근에 생각해 보니, 교회 공동체 안에서 좋은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신 선생님들이 계셨기에 더 꿈꿀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성교제도 성실히(?) 했다. 이 성실함은 여러 사람을 바꿔가면서 만나는 성실함은 아니었고, 한 놈만 제대로, 진득이 성실히 검증했다. 남편의 뭐가 좋아서 결혼했는지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다시 탐색해야 하니까, 다른 글에서 적기로 하고. 하나님은 나의 소원을 아시는 듯이 공동체 안에서 안전하게 교제하고, 결혼까지 축복 속에서 마쳤다. 우리 결혼식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는 또 다른 글에서 적기로 하고. 할 말 많네. 어쨌든 여기까지 정말, 아름다운 반전이야기를 썼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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