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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익 Sep 14. 2023

쓸모를 다한 느낌이었다.

부모가 나를 놓자, 내가 엄마, 아빠를 기다렸다.

나의 쓸모를 다했다는 느낌이 이런 걸까. 허무했다. 엄마와 아빠가 싸울 때, 가운데서 끼어있던 나는 이제 끼지 않는다. 아빠의 정서적 호소를 들어주며, 진정시켜 주며 해결사를 자처했던 나는 선을 그었다. 넘어오지 말라고, 알아서 하라고 선포했다. 엄마에게는 묵혀둔 분노를 토했다. 내가 엄마한테 이렇게 화를 낸 건 아마 살면서 처음이었을 것이다. 건드리지 않았으면 혼자 삭혔을 분노였다. 나는 늘 그랬다. 그런데 엄마가 눈치 없이 또 건드리는데서 참을 수 없이 터져버렸다. 큰 소리로 화를 내고, 엉엉엉 울었다. 그러고 나서 엄마와 아빠는 2주 가까이 연락이 없다. 2주가 한 두 달 같이 길었다. 내 역할이 다하자,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왜 엄마의 연락을 기다린 걸까? 내게 미안하다고 사과해 주길 바랐다. 엄마가 제 자리에 돌아오길 바랐다. 나는 엄마의 관심을 바랐고, 사랑을 바랐다. 엄마가 나를 살펴주기를 원했다. 엄마가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면 되었다. 하지만, 엄마는 ‘힘들었구나.’하고, ‘나는 너를 최선을 다해서 키웠는데. 이제 너 괜찮아지기 바라.’ 남 이야기 하듯이 말했다. 매우 방어적으로 보였다. 절대 엄마의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고, 그건 내가 기대하지만,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지점에 있는 것 같았다. 왜냐면 엄마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드디어 부모로부터 벗어난 것이라면 내가 바라던 일이니 좋아만 할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내 마음은 갈 곳을 잃은 것처럼 황망하고, 쓰라렸다. 이 지점에서 내가 여전히 놓지 못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허상이 어떤 것인지 보게 된다. 내가 무엇을 내려놓지 못했던 걸까? 내가 이렇게 하면 부모가 날 봐줄 거라는 기대, 부모가 나를 필요로 할 것이라는 기대, 우리 가족이 모두 행복하고, 평화로울 것이라는 기대, 아빠와 엄마가 행복한 노년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하지만 나는 엄마, 아빠의 사랑이 필요한 어린 아이가 아닌데.


나는 이렇게 괜찮지가 않은데, 부모는 잘 살고 있다고 하니 마냥 기쁘지 않았다. 내가 가족 내에서 하던 역할(부모의 정서적 부모, 대리배우자, 해결사 등)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모든 것이 제자리에 돌아가는 질서의 회복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관성의 법칙을 거슬러야 하는 일이었다.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가 이 역할에 집착하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한다. 부모가 나를 놓자, 내가 엄마 아빠를, 기다렸다. 이제 부모를 나로부터 놓아주어야 하는 숙제가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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