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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유 May 07. 2024

편지를 쓰고 싶어, 낙엽처럼.

2024년 5월 5일

오늘은 어린이날.

제주도엔 폭풍이 불고 있어요.

그래서 편지를 쓰려고 해요.

멸진의 세상 앞에 선 우리.

창문에 맺힌 빗방울처럼, 제비꽃에 닿는 낙엽처럼 우린 서로를 향해 있잖아요.

그런데도 편지 한 장 쓰지 않았네요.


안녕.

난 안녕이란 단어가 좋아. 사랑이란 단어도 좋아하지만 그건 내게 사치에 가깝 안녕이 더 절실하거든. 대부분 사람들이 이걸 모르지만 곧 알게 될 거야.


매년 5월이 오면 제주의 종가시 나무 아래는 낙엽이 수북 쌓이지. 겨울 동안 입고 있던 외투를 모두 털어내고 찬란한 새 잎으로 몸단장을 하거든.

비 내리듯 떨어지는 낙엽 아래 선 이 시간이 좋아. 동시에 앞마당엔 꽃들이 피어있지. 혹시 제주도에 오면 종가시 나무 아래, 가만가만 낙엽을 두른 제비꽃을 바라보길 권해. 깊은 강물에 드린 산을 바라보듯 말이야.


저 사진을 찍던 날, 편지를 써야겠다 생각했어.

노트북이 고장 났는데 요즘 내 주변 뭐든지 고장이 잘 나고 있거든. 이건  메타포잖아!  마지막이 될지 모를 메시지를 쓴다면 그건 편지가 제 격이.


고장 난 세상이라도 유예의 시간은 있는 법.

어쩌다 널 다시 찾게 될 시간이 올지도 모르지만 이 시간이 마지막이라면 우린 서로에게 무슨 문장을 쓰게 될까?


폭풍이 몰아칠 때 이 편지를 쓰기 시작했는데, 지금 하늘이 밝아오고 새들이 지저귀고 있어. 하늘이 맑을 거란 얘기지. 문장 몇 개 쓰는데 왜 이렇게 오래 쓰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래.

'쓴 문장보다 지운 문장이 더 많아서 그래. 무얼 지울 때는 신중하게 되잖아.  시간을 두고 음미하다가 안녕이란 인사말을 건네고 예의를 갖춰 지우는 거지. 우린 사라지는 것들에게 예의를 잊은 지 오래됐어. 습관처럼 뭐든 지우지. 예를 들어 세월호는.... 어쩌다 그 배 이름에 세월이란 단어를 넣었는지 모르지만 말이야. 난 절대 그 아이들을 잊지 않을 거야.'


안녕이란 단어에서 난 절실함을 느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엔 제비집이 많았어. 어릴 때부터 제비를 좋아했기에 그 아이들을 보살펴줬지.  그런데 언제부턴가 제비들이 오지 않는 거야. 난 너무 슬퍼졌지. 이런 이별에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제비는 믿었거든. 믿음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사람은 믿음이 있어야 해. 그래서 사람이잖아. 난 사람이란 단어엔 믿음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느껴. '~~ 답다.'란 어휘에도 믿음이 있지. 아! 혹시 해서 말해두는데 난 제비에 대한 믿음을 잃은 게 아니야. 우리 집에 둥지를 튼 제비 가족은 엄청난 재앙을 겪은 게 분명하거든. 먼 여행길에서 몰살당한 거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건 익숙해지지가 않아.

난 내 안녕에 대한 믿음을 잃은 거야. 그래서 화가 난 나는 4개의 제비집을 하나만 남겨두고 다 부숴버렸어. 부수면서 이렇게 기도했지.

"하나님, 제가 많은 걸 바라진 않았잖아요. 하나만 남겨둘게요. 이 하나는 지켜주세요."


그러나 올해도 제비는 돌아오지 않았어.

난 부숴버린 제비 집의 잔해 위에 꽃을 심기로 했지. 무언가를 잊기로 할 땐 예의를 갖춰야 하니까. 그런데 그때 제비집에서 무얼 발견했는지 알아?


수많은 머리카락.

60센티 정도 되는 긴 머리카락들이 흙속에 제비의 침과 함께 버무려 있는 걸 본 거야. 머리카락은 흰색으로 시작하다 검정으로 마무리되고 있었어. 사람은 죽어서도 머리가 자라는데 그땐 검은 머리가 된다고 들은 적이 있어. 암튼 제비들이 마지막에 지은 집에만 그게 있었지. 집을 지을 때 이런 흉물스러운 걸 넣었으니 좋은 일이 생기겠어?


제주도엔 흙이 귀해. 제비들이 집 지을 때 쓰는 황토는 더 귀하지. 제비는 어느 무덤에서 이 흙들을 물어왔을까?


폭풍이 지나고 하늘이 짱짱해지자 세탁을 했어. 그리고 지금은 다시 밤이 찾아오고 어디선가 소쩍새가 울고 있단다. 제비는 더 이상 우리 집에 오지 않지만 난 원래 혼자서도 뭘 다시 시작하는 걸 잘하니까.... 안녕할 거야. 안녕해야지.


이 편지는 결국 어떻게 될까? 안녕할까? 공개를 할지 고민되는 밤이네. 일단 내일 다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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