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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유 May 05. 2024

독서의 흔적

왜 살아야 하는가.... '미하엘 하우스켈러 저'

초서 시작


<궁극의 질문>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어차피 우리 모두가 죽을 운명이라면 우리가 살면서 이룬 어떤 것도 남지 않을 운명이라면 애초에 우리가 무언가를 이루려고 애써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기는 할까? 죽음을 면치 못함에도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할까?


<42>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슈퍼컴퓨터는 수백만 년에 걸친 계산 끝에 '삶과 우주와 그 밖의 모든 것에 관한 궁극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낸다. 그 답은 바로 42다. 책에서는 암호 같은 대답이 나온 이유를 컴퓨터를 프로그램한 사람들이 컴퓨터로 해결해야 할 의문이 무엇인지 전혀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대체 궁극의 의문이란 무엇일까?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O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는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괜찮다고 설득하려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쇼펜하우어는 볼테르와 달리 인간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고통과 고난은 삶 곳곳에 만연하며 삶의 본질 가운데 속한다. 우리가 살면서 커다란 재앙을 피해 갈 만큼 운이 좋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남들보다 아주 조금 더 나을 뿐이다. 삶은 근본적으로 필수적으로 고통을 수반한다.


인간은 끝없이 갈구하는 존재다. 산다는 것은 욕망한다는 것이고, 모든 욕망은 부재를 전제한다. 원하는 것을 얻으면 다시 다른 무언가를 갈구한다.

권태는 욕망하는 상태보다도 더 끔찍하다. 권태는 손쉽게 우리를 절망에 이르게 하며 심지어 목숨을 끊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은 뚜렷한 수준의 고통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매우 짧게나마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일시적인 고통의 유예를 가리켜 행복이라 부른다.


쇼펜하우어는 어마어마한 유산을 물려받았으며 그 덕분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파산시키고 파멸시킨 나폴레옹 전쟁을 겪고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결코 행복하지는 않았다. 그가 행복했다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한 사람들, 다시 말해 삶에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고 세상에 만연한 온갖 고통과 인간 존재의 유한함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철학을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세계가 왜 이런 식으로 존재하는지 이유를 묻지 않는다.


"책장을 넘기는데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 울며 이를 가는 소리,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끔찍한 소음이 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철학이 아니다. " -쇼펜하우어-


철학적 의문은 세계가 응당 그래야 하는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각하는 데서 기인한다.

우리는 세계가 좋은 곳이기를 바란다. 아니면 적어도 공정한 곳이기를, 도덕적으로 납득이 가는 곳이기를,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곳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모두가 죽음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죽음을 최악의 악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이런 두려움은 이성적인 판단에 근거를 두고 있다기보다는 순전히 우리의 본성에서 기인한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다. 애초에 죽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은 우리의 부존재를 초래하지 않는다. 설령 죽음이 부존재를 초래한다 하더라도 부존재는 최악의 악은커녕 악조차 아니다.


쇼펜하우어는 죽음이 있으면 우리가 없고, 우리가 있으면 죽음이 없으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죽음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에피쿠로스의 주장을 되풀이한다. (우리가 없어도 죽음은 없다.)

심지어 부존재는 오히려 삶보다 더 낫다고 한다. 이를 분명히 보여주는 사실은 우리가 고통을 겪을 때에만 우리 존재가 제대로 느껴진다는 점이다. 행복이란 고통의 부재, 다시 말해 존재감의 부재다. 우리는 우리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때 가장 행복하며 이로부터 존재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O 쇠렌 키르케고르

"나는 더 이상 내 삶을 견딜 수 없다. 나는 존재를 혐오한다. 존재는 아무런 맛이나 의미도 없이 무미건조할 뿐이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판단하려는 사람은 손가락을 땅에 찔러 넣는다. 나는 내 손가락을 존재에 찔러 넣는다. 하지만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어디에 있는가? 세계란 무엇인가? 누가 나를 이 모든 것에 엮어놓고 가만히 서 있도록 내버려 둔 채 떠나갔단 말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이 세계에 존재하게 됐나? 왜 아무도 내 생각을 물어보지 않고 이 세계의 규칙과 제약에 관해 알려주지도 않았나?  나는 어쩌다 실재라는 거대한 계획에 휘말리게 됐나?"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자기 자신이 되지 않는 것이 훨씬 쉽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되지 않는 쪽이 예외라기보다는 일반에 가깝다. 자기 자신이 되지 않는 가장 흔하고도 자연스러운 방식은 오직 '심미적'으로만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삶을 심미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감각에 몰두하며 주관적인 경험을 풍요롭게 하는 가운데 기쁨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하는 것,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자신의 욕망과 열정을 따르는 것, 육체적 만족과 정신적 만족을 추구하는 것, 삶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온갖 희열을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 심미적인 관점에서 삶의 의미와 목적은 삶을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심미적인 삶은 살만한 가치가 충분해 보일 수 있다. 물론 좋은 삶이다. 당신이 운이 좋고 삶을 즐기는 법을 안다면 말이다.


하지만 심미적 삶에는 나름의 결점이 있다. 사실 심각한 결점이다. 우선 심미적인 삶은 지속되지 않는다. 결코 지속되지 않는다. 그 뒤에는 반드시 고통이 꼬리처럼 따라온다. 그리고 죽음이 아예 삶을 끝낼 것이다.


심미적으로 살아가다 보면 자신이 자기 충족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내적 환경이든 외적 환경이든 환경에 굉장히 많이 의존하고 있다. 환경은 제멋대로이다. 순식간에 변한다.


뿐만 아니라 관심과 즐거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다. 심미적으로 살다 보면 우리는 금방 권태를 느끼며 따라서 삶의 목적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관심사를 찾아야 한다. 권태는 '통찰'이다. 권태로울 때뿐만 아니라 권태롭지 않을 때도 자신이 처해 있는 상태에 대한 깨달음이다.  


 

 


초서 끝








(내 생각의 흔적)


행복이 인생 최선의 목표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모든 행위의 정당성이 행복에 있었다.


"행복하지 않다면 왜 그걸 해?"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렇다면 그때의 나는 과연 행복했었나? 나는 언제 행복했었나?


돌이켜보면 행복에 대한 강박이 언제 생겼는지조차 기억에 없다.

나는 마땅히 행복에 대한 강박을 소멸시켜야 한다.

또한 행복과 불행에 대한 가름도 비워버려야 한다.


이제 나는 부존재의 시간을 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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