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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유 May 02. 2024

참호 일기

나무가 전하는 말

2015. 8. 28

<나무가 전하는 말>

굳이 무언가 의미를 찾으려 하는 시도들은 얼마나 허무한가? 얼마나 허망한가?

내 주위를 둘러보시게. 나만 혼자 살아남아 이곳에 그늘을 만들고 있지 않은가? 나는 참혹한 학살의 현장에서, 사랑하는 이들의 비명을 기억한 채 혼자 살아가는 존재라네.

그래..... 거기 단 하나 예외가 있지. 당신이 앉은 옆에 그 아이는 3년 전 머리를 내민 나의 아이라네. 그동안 내 아이들도 수없이 죽어갔네.

인간은 내 아이가 2살, 3살이 되면 어김없이 뽑아버렸지. 그렇다면 다른 잡초와 다를 게 무엇인가? 나는 나무라네.  사람들은 잡초와 내 아이들을 함께 뽑아가며 내 영예를 조롱하고 있어.

나의 삶은 사랑하는 존재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끊임없이 떠올리면서 치욕을 견디는 시간으로 채워져 있다네. 나는 지금도 인간들이 이 아이를 언젠가 데려가겠지 하는 불안과 절망 속에 살고 있다네.

인간들은 왜 이런 형벌을 나에게 주는 거지? 사람들은 신음하는 내 앞에 서서 웃고 떠들며 내가 뻗은 가지 흉내를 내더니 웃으며 떠나더군. 뭔가? 조롱하는 건가?

맞네. 맞아. 나는 조롱받아 마땅한 것 같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지. 두려움에 떨며 내 운명을 타인에게 맡긴 순간 비천해지는 법이지. 그러고도 햇빛이 내리면 팔을 활짝 펴고, 비가 내리면 고개를 숙이며 맛있게 먹는다네. 잠시라도 아주 잠시라도 나의 비천함을 잊는 순간이지.  하지만 배불리 먹고 난 뒤, 태양이 저 산 너머로 지고 나면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해. 그때부터 참혹한 형벌이 다시 시작되는 거야.

아! 그 수많은 밤! 내 귀에만 들려오는 절규들!


나무로 살고 싶은 나무의 영예를 우리는 알고 있을까?


비껴 앉은 당신 아래 앉은 나도 비껴 있다네.    

어린 시절,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리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지. 우리 부모의 부모, 그 부모의 부모들은 열심히 나를 위해 낙엽을 내려주었지. 그 낙엽들 덕분에 나도 겨드랑이로 낙엽을 내리는 어른이 될 수 있었다네. 낙엽을 내리고 그 낙엽에 식은 물을 마시면서 새들이 놀러 오고 그런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어.


하지만 지금 나를 보게나.

인간들이 매일 여기 오는 바람에 새들은 더 이상 내 겨드랑이 밑에 둥지를 짓지 않아.


그러나 나는 오늘도 낙엽 내릴 준비를 하고 있지. 내 낙엽에서 자랄 아이도 없는데 말이야.

그래도 나는 계속 살아갈 거야. 인간들이 사라지는 그날을 지켜봐야지. 얼마 남지 않았어.

하늘과 땅에서 끊임없이 그날을 약속하는 목소리가 들리고 있거든.


인간들 가운데 자네 같은 존재가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안 건 아니야. 간혹 아주 가끔씩 내 목소리를 듣는 인간이 있기는 있었어. 그런데 자네는 조금 특별하군.

나는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해서 내 절망까지, 내가 매일 밤 듣는 비명에 대한 이야기까지 말하진 않거든. 그런데 자네는 내가 말하기도 전에 내가 아파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 나를 쓰다듬었어. 그건 뭐지?

그리고 새.... 지금 내 어깨에 새가 왔어. 이 새는 자네를 두려워하지 않는군.

자네는 누구인가? 누가 자네에게 낙엽을 내려주었는가?




나는 대답했다.

"나는 당신과 같아요. 나도 내 낙엽을 내려줄 아이가 없지요. 내 아이가 태어나면 그 미래가 어떻게 될지 보았거든요. 그래서 아이를 낳지 않았어요. 아이는 서서히 고통을 느끼며 죽게 되면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원망하게 되어 있지요. 아이니까.....

하지만 우리는 사랑을 배우기 위해 이 세상에 왔잖아요. 사랑이란 걸 가르쳐 줄 가장 훌륭한 스승이 아이잖아요. 저는 아이가 없으니.... 이렇게 사랑이 뭔지 알기 위해, 사랑을 만나기 위해, 즉 어딘가 계실 신을 만나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중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세상은 물결치고 있잖아요.  온 세상이 물결이란 걸 아는 생명은 그런 걸 아는 생명끼리 뭐든 공유하게 되어 있잖아요. 저도 당신처럼 세상의 물결을 볼 줄 알도록 태어났어요.

인간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믿기 힘든 표정을 지으시는군요.  

아무튼 이젠 상관없어요. 당신도 알다시피 종말이 오고 있잖아요. 인간을 대신해 당신께 사과를 드리고 싶지만 그게 당신에게 아무 소용도, 위안도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그래도 말하고 싶어요.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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