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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유 Sep 22. 2022

참호 일기

2022. 9. 12

2022. 9. 12. 


아내는 언론인 변상욱을 좋아한다. 

한동안 그녀가 그의 책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며 기분이 좀 그랬다. 

다시 말하면 그 기분은 나 자신에 대한 실망인 셈이다. 


우리는 합의 부부다. 우리가 합의한 내용은 이렇다.

“혹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언제나 뒤끝 없이 보내주기” 


그런데 이 정도에 흔들려서야 뒤끝 없이 보낼 수 있겠는가? 

나는 나 자신에게 좌절하며 또한 그것에 대해 사유한다.    


그런데 오늘 아침식사 자리에서 마침 그녀가 젓가락을 흔들며 이렇게 말한다.

“오빠, 사유가 뭔지 알아?”


모처럼 책 한 권 읽었나 보다, 생각하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사유란 단어의 한자가 뭔지 알기나 하고 물어보는 거야?”


그랬더니 자신 있게 대답한다.

“그야 생각할 사(思)!.... 그리고 있을 유(有)!”


나는 입에 든 밥풀을 간신히 보전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당장 사전 찾아봐.”

“있을 유(有) 아니야? 오빠는 알아?”

“그 유는 생각할 유(惟)”


그녀는 밥을 먹다 말고 휴대폰을 들고 검색한다. 그러더니 사뭇 진지한 표정이 되어, 또한 아주 머쓱한 말투로 이렇게 말한다.

“어? 맞네.. 오빠 대단하다.”


참고로 그녀의 가장 취약한 부분 중 하나가 한자다. 나는 그걸 알고 이용하는 간사한 자다. 

솔직히 나도 아니면 말지, 식으로 때려 맞춘 거였다. 


가슴에 뿌리를 두고 피우는 생각 


그런데 막상 질문을 받고 보니 <사유>란 단어에 대해 사색하게 되었다. 

‘사유란 그렇다면 생각을 두 번 한다는 뜻인가?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는 뜻인가?’

우선 나는 아내가 책의 어느 부분을 읽고 나에게 아는 척을 했는지 궁금해졌다. 책을 살짝 가지고 와 목차를 보고 <사유>란 단어가 들어간 차례를 펼치니 이런 내용이 나온다.


<언론과 교회 일부 목회자들이 드러낸 저급함과 무지를 들여다보며 생긴 질문은 ‘도대체 악이란 무엇인가?’였다.... 한나 아렌트의 악에 대한 철학적 바탕은 아마 처음에는 칸트의 ‘심층적 악’이었나 보다. 그러나 아이히만(유대인 학살 범죄자)의 재판이 진행될 때 그녀의 눈에 악의 실체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데 악은 어디서 오는 걸까? 아렌트는 고민한다.... 고민 끝에 탄생한 것이 악의 평범성이다. (사유하지 않는 데서 탄생하는 惡) 사유란 자신이 하려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떤 배경과 맥락 속에서 여기까지 왔고 어디로 갈 것인지를 따지는 사고 작용이다. 사유는 멈춤에서 나온다.> 

-변상욱 저, ‘두 사람이 걷는 법에 대하여’ 중 발췌-


다음에 내가 한자사전에서 찾은 것은 사유의 ‘유(惟)’였다. 이 단어의 의미는 ‘생각하다’ 외에 ‘펼치다’란 뜻도 있었다. 그렇다면 ‘사색’이란 단어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O사색 - 어떤 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이치를 따짐
O사유 - 대상을 두루 생각하는 일


그렇다면 깊게 생각하는 것과 두루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 

나는 이것이 말장난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순우리말 ‘생각’이란 단어가 훨씬 좋다. 

‘생각’의 의미야말로 깊고 넓다. 생각은 가슴에 뿌리를 두고 머리로 향하는 나무다.


사유나 사색이란 단어로 대치할 수 없는 ‘생각’이란 언어의 영역을 떠올려 보자.

예를 들어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올릴 때 사용하는 문장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떨려오는 걸 어쩔 수 없다.’에서 생각을 '사유'나 '사색'으로 대치하면 아주 이상하다.  오히려 '생각'이란 단어가 더 두루, 깊은 의미를 표현하는 것 같지 않은가?   


생각이란 단어의 뜻은 정말 다양하다. 언젠가 옆집에 살던 신혼부부가 제주를 떠나게 되어 이별인사를 할 때도 난 그들에게 선물을 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거 그동안의 우리를 생각하며 준비했어.” 

이때의 생각은 ‘사유, 사색’이란 단어는 감히 어울리지 못한다. 


그 외에도 참 많은 사례가 있지만, 아무튼 생각이란 단어는 일종의 김치다. 

우리 밥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김치.


김치는 만드는 과정에서 말아서도 먹고, 막걸리와 1대 1로 대작하기도 하고, 볶아서도 먹고, 묵혀서도 먹는다. 심지어 양념으로도 넣는다. 이 세상에 정말로 김치 없으면 무슨 맛으로 살까?


'생각'에 대한 이런 생각으로 사유하다 보니 하루가 다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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