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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유 Oct 17. 2022

아내를 위한 문장 (2)

벽오금학도 -이외수-

그들은 대개 어릴 때부터 강은백과 다른 방법으로 공부를 해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만사물을 스승으로 삼으라고 가르치던 할머니가 없었다. 머리를 써서 공부하지 말고 마음을 써서 공부하라고 가르치던 할머니도 없었다. 그들은 교육제도와 교육기관을 통해 소정의 과정을 이수하는 것을 대표적인 공부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을 써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써서 공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지식 자체가 곧 깨달음은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 소홀히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스승으로부터 꿀이 달다는 정보를 전달받고 그것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는 상태를 지식으로 알고 있었다.
꿀맛이 어떠냐.
단맛입니다. 
그러면 꿀맛을 아는 것으로 간주했다. 꿀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도 그렇게만 대답할 수 있으면 꿀맛을 아는 것으로 간주했다. 꿀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단지 꿀맛이 달다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진정한 꿀맛을 안다고 간주되어질 수 있을까?  그들은 대부분 진리의 겉껍질을 잠시 매만져 보고는 먹고사는 일에 바빠지기 일쑤였다.  하루 종일 그들은 같은 일을 기계처럼 반복하면서 꿀맛 모르는 인생들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시간을 끌고 다니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끌려 다니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경영하는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고 전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전쟁 이외의 마땅한 방법은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벽오금학도 P273- 



10여 년 전 이 글을 읽을 때와 오늘 이 문장을 다시 읽을 때의 소회가 확연히 다르다. 

10여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무엇이 달라진 걸까? 

10여 년 전의 세상과 지금의 세상은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렇게 끊임없이 바뀌는 선상의 나에게 가장 확실한 진실은 결국 죽는다는 것인데, 이런 삶에 무슨 의미가 있기는 한 걸까? 


10여 년 전의 나는 세상이 주는 건 별생각 없이 받아먹는 어린 새와 같았다. 책을 읽어도 그 속의 말들이 전부 진실이라 믿고 수용하기에 바빴다. 어린 나이도 아닌데 그랬다. 지금 생각하면 창피하다. 

그런데 요즘을 떠올리면 더 어린아이가 된 것 같다. 세상은 온통 질문으로 도배된다. 어디서 그 많은 질문들이 쏟아지는지 나의 일인데도 알 수 없다.      


위 문장을 다시 읽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의문은 이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을 쓴 고 이외수 선생은 꿀맛을 알고 죽었을까? 꿀맛을 맛보며 살았을까? 그가 맛본 꿀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마음을 써서 살았을까?’


돌아가신 분께 물어볼 수도 없고, 사실을 확인할 길은 없지만 우리 일반의 눈으로 볼 때 이외수 선생의 말년은 참으로 불쌍해 보였다는 의견이 많은 것 같다. 이외수 작가는 조강지처의 마음조차 전쟁 이외의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했지 않았던가? 


이번 책모임에서 시인 고은의 ‘순간의 꽃’을 읽어보기로 정했을 때도 갑론을박이 많았다. 시인이 그가 쓴 시처럼 살지 못했다면 그의 시를 버려야 한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고, 시와 시인의 인격은 분리해야 한다는 의견이 소수 나왔었다. 


나는 소수의 의견이었다. 나의 의견은 ‘작가가 글을 쓸 때는 그 일상 인격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뭔가 어디선가 날아온 메시지를 받아 적는 느낌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글의 양분은 그 어떤 선입견을 갖지 말고 글 자체로 평가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떤 회원은 그가 그런 사람인 걸 알고 나니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역겨워서 도저히 시가 읽히지 않는다고 한다. 아무튼 그런 감정을 유발하는 좋은 책은 드문 법이니 읽어보자 설득했다.  


그다음엔 이런 의문도 든다.

‘마음을 써서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자신의 마음조차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그들은 모두 마음을 쓰지도 못하고 죽게 되는 걸까? 그들에게도 마음은 분명 있을 텐데 그들이 자신의 마음을 모른다고 당연시하는 나는 왜 이런가?’ 


집이나 직장이 없어도 해외여행이나 비싼 외제차 구입은 놓칠 수 없다는 유튜버의 영상 조회수가 수십만에 이르는 걸 보면 그런 삶이나 그런 영상에 마음을 뺏긴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나도 마음을 써서 살고 있어요. 온 마음으로!”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마음을 써서 산다는 의미를 모른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분노 유발 유튜브 영상도 정말 인기가 좋다. 무능력하고 굴욕적 외교를 일삼아 국력을 낭비하고, 외교 무대에서 미국 의회에 대한 욕설로 국격을 떨어뜨린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는 국민들이 정말 많다. 수천만에 달하는 그들의 분노는 어떤 마음에 넣어줘야 하는 걸까? 그런 대통령에게 분노하지 않고 ‘그래도 우리 대통령이니까 제대로 학습할 때까지는 기다려줘야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사람 얘기를 들어보면 전임 대통령에 대해서는 또 엄청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전임 대통령을 욕하며 그가 북한에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 군함이 욱일기를 달고 독도에서 군사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또 아무 말도 안 한다. 


이런 편향된 분노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이는 전 세계적 현상이 되어 버렸는데 이는 대부분 스마트폰에 마음을 뺏긴 인류의 의식구조 변화에서 기인한다 볼 수 있다. 

가만있어봐.... 나는 의식은 온전한가?


나는 벽오금학도의 위 문장을 읽고 작금의 인류 현상을 다시 보게 되었다. 우리 인류는 마음을 쓰며 사는 것과, 자신이 맛본 인생의 꿀이 가짜인지 진짜인지 돌이켜보지 않는 것 같다. 하긴 거창하게 인류까지 들먹일 필요 없이 이는 나의 현실 문제다. 나는 연애할 때부터 이런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걸 좋아했는데 아내는 이런 대화에 알레르기를 일으킨다. 

그때는 어릴 때니까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하루에 한 번 정도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질 때가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아내와 자연스럽게 이런 대화를 유도할 방법을 찾아냈다. 

제주에 살면 사람들을 관찰하기 참 좋다는 생각이 든다. 제주 인구가 70만을 넘었는데 이번 10월 한글날에 제주를 찾는 관광객 수만 16만 명에 가깝다. <한 달 살기>를 하고 있거나 차를 끌고 와 장기 캠핑하고 있는 관광객 수까지 더하면 일 년 평균 관광객 수는 1000만 명을 훌쩍 넘을 것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제주도를 찾는 관광객은 더 늘고 있는 추세다.   


우리는 종종 일부러 이렇게 관광객이 많은 관광지에 앉아 시간을 보내곤 한다. 한 시간 정도 앉아 있다가 문득 우리가 사람 구경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함께 웃은 적이 있다. 사람들은 제주도를 구경하러 오고, 우리는 구경하러 온 그들을 구경한다. 


아내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

“가끔 이렇게 사람 구경하러 나와야겠어. 느끼는 게 많아.”


나는 아직도 그때 아내에게 무엇을 느꼈냐고 묻지 못한 걸 후회한다. 나는 아내의 말을 듣고 따라 웃기만 했다. 그때 난 이심전심의 마음 정도로 얄팍하게 그 말을 들은 셈이다. 

분명 내가 느낀 것과 아내가 느낀 것에는 차이가 있을 터다. 


나는 ‘맞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세상엔 존재했었지. 저 커플은 너무 좋아서 무얼 하든 웃네? 나도 한때 저런 때가 있었지.’ 이렇게 잠시 망각했던 존재와 시간에 대해 떠올리고 있었지만 아내는 분명 다른 마음으로 그들을 지켜봤을 것이다. 


오늘은 그곳을 다시 찾아 아내의 마음을 제대로 물어봐야겠다.  그리고 요즘 무엇에 마음을 쓰며 지내는지도 물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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