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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유 Nov 03. 2022

과거에서 온 편지 (2)

참호 일기.... 2022. 10. 29

나는 부러진 곡괭이(농기구 살 돈도 아껴야 하는 형편)와 날이 반쯤 무뎌진 호미를 들고

흙을 다시 골라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금이 가 버려진 화분은 텃밭으로 쓸 흙을 골라 담는 용기가 되었고,

억새 뿌리 및 돌멩이는 한 곳에 쌓아놓았다.


이들 모두 태어난 보람을 느낄 수 있게 아름답게 재탄생시킬 예정이었다.

(자연을 둘러보라! 내 눈에 자연은  커다란 보물 상자다.

오직 인간과 인간과 관련된 것들만이 자연에 흠이 된다.)


이렇게 시작된 여정의 결과는 어떻게 끝이 날까?


조성한 텃밭 뒤로 오래 함께 한 두릎나무 숲이 보인다.


처음 작정했을 때는 돌을 골라내고 텃밭 담까지 제대로 만들자면 겨울을 꼬박 보내야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텃밭에는 이미 당근, 루꼴라, 마늘, 유채, 케일, 시금치, 도라지, 무, 부추, 대파가 자라고 있다.

이건 마음이 급한 아내 덕분이기도 하다.

종일 흙을 골라내고 담을 쌓고 텃밭 하나를 만들면 아내는 신나서 바로 씨를 뿌렸다.

(모두 두 식구 먹을 분량으로 조금씩, 다만 유채는 담장 대신으로 좀 많이)

그리고 나는 그 텃밭이 훤히 보이는 창 아래 앉아 이 글을 쓴다.


1층 서재 창에서 보이는 풍경... 우측으로 콘크리트 잡석으로 다진 옆집 땅이 보인다.


이렇게 되고 나니 해피엔딩 같지만 아직 나에게 상념을 주는 존재가 살아있다.

옆집 법인체는 그 법인의 사무국장이란 사람이 애월에 있던 살림을 처분하고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집 관리를 위해 그러기로 한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사무국장이란 사람은 콘크리트 잡석 길에 매일 아침 제초제를 뿌린다.

나의 텃밭 바로 옆이다.

내가 텃밭에 물을 주고 있으면 옆에서 제초제를 뿌린다.


아침에 만나면 웃으며 인사는 잘한다.

“안녕하세요?”   

그러면 나도 안녕하시냐고 대답은 하는데 그는 바로 고개를 돌리고 칙칙 제초제를 뿌린다.

이 뭣 같은 풍경을 지켜보자니 웃음밖에 나오질 않는다.

그런 웃음으로 인사는 한다.  


다행히도 이 사람은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엔 제초제를 뿌리지 않는다.

하지만 두 명의 남자가 나란히 서서 한 명은 맨땅에 제초제를 뿌리고 있고 한 명은 씨앗에 물을 주고 있는 풍경은 기묘하고 슬프다.

(보는 사람은 재미있을 수도 있겠다.)


나는 콘크리트 잡석 위에 잡초 씨앗이 있을까 염려하여 제초제를 뿌리고 있는 남자를 향해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제초제를 뿌려도 씨앗은 죽지 않아요.”


하지만 나는 이 말을 그에게 건네지 않는다.

누가 우호적 무관심이란 말을 했던가?

나는 우호적이지도 않고 무관심하지도 않다.

다만 내가 이런 말을 했을 때 저 남자의 다음 반응이 뻔히 보일 뿐이다.

태양은 점점 겨울이 올 것을 말하고 있는데, 제초제를 열심히 뿌리는 자에게 무슨 말이 소용 있으랴.

어리석은 사람은 그 무슨 충고를 듣고도 또 다른 어리석은 행동을 보일 뿐이라는 걸,

지난 삶은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하루는 이 남자의 아내가 그 텃밭에서 생명이 올라오는 장엄함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나름 뭔가 느꼈는지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신기해하며 이건 뭐냐 저건 뭐냐 묻는데 그 남자가 자기 아내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 후로 그의 아내는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그의 아내는 그에게 무슨 얘기를 들었을까?

내 귀에는 무슨 말이 오갔을지 다 들렸다.


이 사연에는 사실 한 가지

또 다른 스토리가 숨겨 있다.

옆집은 우리 집을 사고 싶어 다.


옆집과 우리 집을 합치면 꽤 근사한 프로젝트를 수행할 적당한 크기가 나오고,

무엇보다 길과 연결된 유일한 두 필지이기 때문에 근방 숲을 내 땅처럼 독점할 수 있는

꿈같은 공간이 탄생한다.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텃밭도 도유지이지만

 내 땅을 사는 순간,

도유지를 구입할 수 있는 권리를 취득하게 된다.

그러니까 공시지가로 살 수 있는 저렴한 땅이 호박처럼 굴러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터를 잡고 있으면 내 허락 없이 그 땅을 구입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도에서 마을을 만들 때 양쪽 공동의 권리를 부여한 임야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가 보기에 나는 얼마나 얄미운 텃새일까?

(그는 집주인이 된 지 고작 4년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저쪽에서 우리 집을 사겠다고 의사를 건넨 적은 있다.

하지만 저쪽에서 제시한 가격은 너무 터무니없는 흥정이었다.

나에게 비웃음을 산 일은 또 있다.

흥정할 때 자기가 서귀포 어디 땅도 구입할 예정이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 집을 구입할 때는 돈이 하나도 없다고 불쌍한 표정을 짓는다.  

자기가 내뱉은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걸까?


그런데 최근 세상이 워낙 흉흉해지다 보니

누구도 집을 살 사람은 없고,

이 사람도 중국에 사두었던 아파트도 처분하고 자금을 마련하느라 분주한 모습을 보인다.

나는 저쪽에는 내 집을 팔고 싶지 않다.


분명 저 사람은 나보다 돈이 많다.

천문학적으로 나보다 많다.

하지만 나보다 부자는 아니다.


나는 텃밭에 채소가 자라는 걸 보면서 앞으로 다가올 긍휼의 시대를 견딜 자신감을 느낀다.

상징이란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것이다.

분명 채소로만 삶을 견딜 수는 없는 일이지만, 채소가 자라는 텃밭은 나에게 어떤 상징이 된 셈이다.


혹시 긍휼함을 느끼는가?

나만의 상징을 만들라.

이 상징은 쇼펜하우어가 말한 <의지와 표상>의 개념과는 조금 다르다.


이 상징은 의지도 아니고 표상도 아닌

살아있는 믿음이다.

텃밭에 물을 주면 씨에서 머리를 내민 여린 떡잎은 제각각의 모습으로 반응한다.

어떤 떡잎은 떨어지는 물을

온몸으로 당당하게 받아내지만

어떤 떡잎은 옆으로 쓰러져 일어서지 못한다.


 나는 그런 떡잎의 쓰러진 반대쪽 뿌리를 흙과 힘께 손가락으로 꾸욱 누른다.

그러면 물기를 머금은 흙은 내가 누른 손의 무게만큼 뿌리의 빈 공간을 채우고

쓰러진 새싹을 일으켜 세운다.

새싹이 바짝 선 걸 확인한 후, 나는 손가락 모양으로 움푹 파인 곳에 좋은 흙을 다시 채워 넣는다.


이렇게 하고 나면 이 새싹은 다음 날 확실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단단하게 서서 떨어지는 물을 바로 마주하는 힘을 낸다.


이 과정이 상징이다.

이 경험이 상징이 된다.

새싹을 변화시킨 힘이 내 안에도 축적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이 상징의 시작은 자세한 관찰이다.)


기계나 비료를 써서 대량으로 밭을 키우는 농부는 이 상징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흙을 만져보지 못한 사람도)

일상에서 자식을 키우는 부모도 이런 상징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나는 효도라는 개념도 이제는 변해야 한다고 믿는다.

부모가 나를 태어나게 해 주었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은혜를 갚는 게 아니라,

부모는 자녀를 통해 상징을 가지게 되었으니 자녀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


이 말을 이해한다면 그분은 내가 말한 상징을 이해한 사람이다.


나는 오늘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보낸 편지를 만났다.


그 편지의 내용이 마침 요즘 내가 느끼고 있는 상징에 대한 이야기이고 보니

삶에 대한 경외가 차오른다.


"꽃은 불완전함들로 공전하며 완전에 이른다."


꽃은 뿌리와 줄기, 잎과 꽃받침 가운데 하나라도 없어지면 씨를 만들지 못한다.

하지만 각각의 불완전한 것들이 결국 씨앗이라는 완전한 우주를 탄생시킨다.


가만있어봐.

오늘 쓴 이 글도 어쩌면 미래의 나에게 어떤 편지가 되어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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