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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유 Nov 04. 2022

일상, 한 컷

2014년  늦봄


2014. 5. 31. 토. 맑고 더움.


<일상, 한 컷>

갤러리 노리에서 오픈 전.

박서보 선생님 오신다기에 참석했다.

오픈 전 화가가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대가, 박서보 선생님을 만나자 수줍어하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그저 이것저것 그렸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화답하신다.

“그림을 이것저것 그릴 수는 있어도 이것저것 사는 건 안돼.”


그리고 전시된 그림들을 보며 나에게 이 그림은 뭐가 안 좋고, 저 그림은 이렇게 그리면 더 좋았을 텐데, 하며 그림 보는 법을 알려주셨다.

(당시 나는 이것이 영광이란 걸 몰랐다.)


<일상, 한 컷>

조식 토스트를 만들고 오름 가이드를 했는데 오늘따라 말 떼가 길을 막고 서 날 노려본다.

평상시엔 길을 비켜줬는데 오늘따라 심보가 고약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그래서 쫄았다. 저 애들이 왜 저러지? 누군가 앞선 관광객에게 엉덩이라도 맞았나?)


“워! 워! 비켜. 자! 비킵시다, 여러분!”


결국 궁색하게 이렇게 20분 정도 소리만 치다 되돌아왔다.

아.... 쪽팔려.


<일상, 한 컷>

이상한 그리움. 누구를 향한 그리움인지 모를 그리움.

그래서 편지를 썼다.


“네가 보낸 편지는 차곡차곡 쌓인다, 눈송이처럼.

네가 부친 사연은 무심히 흐른다, 강물처럼.

일상이 너무 다른 우리, 너무 먼 미래엔 필시 낯설어 있을 거야.

그래서 놀랄 거야.... 너의 성숙함이, 눈빛이, 손끝이.

낯설지만 기쁠 거야, 아름다워서, 향기로워서.

하지만 어쩌면 실망하겠지, 한결같아서.

변해 봤자 조금 더 마른 정도?

조금 더 태양에 그을리고, 조금 더 벌레에 물리려고 해.

하지만 말은 더 없어지고 내 눈길은 점점 더 다른 곳에

맞아, 그래서 아직까지도 우린 만나지 못한 거야.

너의 얼굴을 모르는 거야.

어? 너는 어쩌면 나였나?"


<일상, 한 컷>

"이쪽으로 얼굴을 돌리시게.

나 역시 외로우니

가을 저물녘" -바쇼-


이제야 널 하염없이 볼 수 있는데, 헤어질 시간


노을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겠구나, 싶은 시를 만났다.

어떻게 노을을 보면서 외롭다는 생각을 할까?  

외로워지는 순간을 어떻게 견딜까?

아름다운 존재와 마주하면 외로워지는 게 제일 두렵다.  사랑하기 때문에 닮고 싶지만 어찌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만나야 할 존재는 있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공황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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