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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유 Nov 02. 2022

참호 일기

과거에서 날아온 편지


과거에 내가 지금의 나를 위해

보낸 편지

2022. 10. 29.



가끔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위해 편지를 보내준 것 같은

글을 마주할 때가 있다.


오늘 청소하다가 책장 뒤로 떨어진

컵 받침 하나를 발견했다.

마을 숲 가꾸기를 하면 꽤 괜찮은 장작 몇 개를 주워올 수 있다.

 가운데 상태가 좋은 나무 몇 개를 골라 얇게 자른 후 찻잔 받침으로 쓰곤 했는데 그중 하나였다.

꺼내어 보니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단면에 무어라 쓴 낙서가 보인다.


먼지를 훅 불고 물티슈로 깨끗하게 닦자 이런 문장이 드러났다.

“꽃은 불완전한 것들로 공전하여 완전에 이른다.”  


이 문장을 쓰게 된 건 자신의 마당을 돌보던 이웃 농부와의 대화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전직 신부였다.


“이렇게 제초제를 뿌리거나 잡초를 뿌리째 뽑아도 잡초는 매년 계속 나게 되어 있어요. 신기하죠? 도대체 어디서 날아와서 이렇게 사람을 성가시게 하는지.... 그런데 사실 이건 날아온 씨앗이 아니라 원래 이 땅에 오래전부터 숨어 있던 씨앗이 발아한 거랍니다.  씨앗은 그 어떤 제초제로도 죽일 수 없어요. 산불이 나도 땅 속에 숨어 있던 씨앗은 상처를 입지 않아요.”  


이 말을 들은 게 8년 전쯤이었을까?

나는 그날 도끼로 맞은 듯했다.

그리고 급히 우선 보이는 대로 이 컵받침에 쓱쓱 써놓았는데

메모의 내용이란 다시 보지 않으면 상기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리고 오늘 나에게 이 문장은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한 메시지가 되었다.  


이 글이 이렇게 나에게 다시 온 것은 우연일까?

마치 씨앗이 이 문장을 가지고 땅 속에 숨어 있다 싹을 틔워 두 손으로 편지를 전해준 느낌이 든다.  


완전체를 향해 공전하는 자연



최근 텃밭을 하나 만들게 되었는데 사연이 길다.

우리 집은 이웃집과의 경계에 작은 임야가 있다.

담을 쌓지 않고 그 임야를 경계로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구조다.

이 작은 임야는 집을 지을 때 대략 정리를 하긴 했지만 세월이 흐르니 다시 잡초가 무성해졌다.

우리 집에서 아무리 잡초를 정리해도 옆집 잡초가 자꾸 우리 집 쪽으로 넝쿨을 타고 넘어오니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는 그냥 숲으로 조성하자. 이건 승산이 없는 싸움이야.”  


이렇게 우리 쪽에 붙은 임야 일부를 정리하고 두릅나무를 심어 두니 오히려 해마다 보람이 있었다.

두릅나무는 넝쿨에 휩싸여도 강인하게 키를 키웠고

그 풍경을 보면 제주다운 무언가를 느낄 수 있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잡초가 너무 무성해지니 옆집은 관리에 문제가 발생했다.

주인은 몇 해 전 자기 집을 어느 신혼부부에게 연세(월세의 1년 단위 개념) 주었는데 관리가 소홀하여 넝쿨이 에어컨 실외기를 점령하더니 집까지 덮어버린 것이다.


결국 그 신혼부부는 마당 넓은 집에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절실히 깨달은 후

지난달 나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안녕히 계세요. 이제 저희 이사 가게 되어서 인사드리러 왔어요.”

“아! 떠나세요? 어디로 가시게요?”

“저는 서울로 가고, 남편은 제주에 남아요.”

“네? 왜 따로?”

“저희 이혼했어요.”


나는 이혼하게 되었다는 그 말을 끝까지 농담으로 들었지만 그 말을 건넨 새댁의 얼굴엔 냉소가 섞여 있었고, 신랑의 얼굴은 처연하면서

 왠지 결연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 일이 있은 후 며칠 지나지 않아 드디어 옆집에 주인이 들어왔다.

옆집 주인은 한 명이 아니다. 무슨 법인체였는데 나는 아직도 이 사람들의 정체를 모르겠다.

아무튼 집이 망가지자 집주인은 집수리에 본격 박차를 가한다.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이 임야에 포클레인을 대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곳엔 두릅나무 숲이 있지 않은가?

어느 날 시끄러운 소리에 나가보니 포클레인이 우리 쪽 임야까지 마구 파헤치고 있었다.

그래서 급히 나가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 이 땅의 정중앙에 보시면 이렇게 군데군데 담을 쌓아두었잖아요.

그 담 저희 경계는 그냥 놓아두세요. 저희가 알아서 텃밭을 하든 할게요.”


이후 포클레인 기사는 집주인과 뭔가 상의를 하더니 알았다고 한다. 나는 안심하고 다시 집으로 들어갔는데 또 시끄러운 소리가 나기에 창밖을 쳐다보니 트럭으로 정체모를 흙을 싣고 와서 우리 쪽 땅에 붓고 있었다. 뭘 하려는 건지 궁금해서 결국 다시 나가게 되었는데 내가 묻기도 전에 포클레인 기사가 함빡 웃으며 말했다.


“텃밭 하신다고 했지요? 이 흙으로 쓰시라고 퍼왔어요.

그쪽은 텃밭 하시고 우리 쪽은 잡석으로 깔 예정입니다.”


제주 사람의 특징이다. 물론 난 이 분이 선의로 하신 행동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 결과는 12년을 제주에 산 나조차도 아직 적응이 안 되는 뭔가가 있다. 일방통행이라고 할까?

아무튼 어쩌랴. 나도 텃밭을 만들 예정이라 말한 죄가 있으니 그저 감사하다 말할 뿐이었다.


자왈에 소나 말을 풀어놓으면 잡초는 자동으로 정리된다. 소를 키울까?


집주인은 분명 두릅나무 숲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니 텃밭에 채소든 뭐라도 심게 되면 잡초는 알아서 우리 쪽에서 제대로 관리하지 않겠느냐 하는 엄포가 흙더미에 섞여 있었다.

아.... 골치 아파.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또 포클레인 기사가 말을 붙인다.

“옆집에서 저 나무를 버린다고 하는데 이쪽 임야에 심는 게 어떨까요?”


보니 까마귀쪽나무였다. 사계절 푸른 나무이고 새들이 좋아하는 열매를 맺지만 수형은 정원수로 그다지 반기지 않는 나무였다. 그런데 그 나무를 심자고 하는 자리가 두릅나무가 햇빛을 받는 걸 방해하는 자리였다. 그러니까 두릅나무를 가리는 자리인 셈이다. 그래서 선뜻 찬성하긴 어려웠다.

좀 생각을 해 보겠다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가 말했다.

나무 하나를 심어준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고.... (헉!)   


그날 나는 다른 쪽에 일정이 있어서 잠시 집을 비웠는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 심은 나무를 보니 이건 이식을 한 게 아니고 마구 쑤셔 넣은 느낌이 들었다. 나무 곳곳이 상처 입고, 금이 가고 부러진 상태였다.

(결국 시름시름 앓더니 죽어 가기에, 유일하게 푸른 잎 세 짝을 내고 있는 작은 가지 두 개 남겨두고 굵은 가지는 모두 잘라내야 했다. 살았음 싶다.)


나는 사람들에게 횡포를 느낀다. 이제는 관광객 보는 것도 싫어졌다.

오죽하면 코로나 같은 바이러스가 발생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이런 어두운 공기에 몰입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잘 안다.

카뮈가 말했듯 나는 이에 반항해야 한다.

저항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보는 풍경은 모두.. 이방인의 풍경일지도 모른다.


나는 텃밭을 즐거운 마음으로 조성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일은 제쳐두고 팔부터 걷어 올렸다.

그런데 텃밭을 위해 친절하게 퍼다 놓은 흙을 보니 어느 야산에서 퍼온 거였다.

살펴보니 억새 뿌리와 돌멩이가 흙의 절반을 넘었다.

한숨이 먼저 나왔지만 즐겁기로 마음먹었으니 이 정도로 무너지면 아니 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흙을 골라내고 있을 때 갑자기 요란한 소리와 함께 트럭이 등장하더니 잡석을 뿌린다.

뿌연 먼지 뒤에 남은 건 콘크리트 잡석이었다.

‘이건 폐자재가 아닌가?’


나는 말없이 집으로 들어갔다.

결국 콘크리트 잡석 작업을 할 때는 창문도 닫고 외출을 삼갔다.

이때 나는 모질게 먹은 마음이 무너지고 슬픔이 몰려오는 걸 느꼈다.


옆집 주인들은 잡초로 무성해지고 관리 소홀로 집이 무너진 분노를 엉뚱한 곳에 쏟아붓고 있었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나무는 정원 정리하러 온 업체가 뽑아가든지 대부분 폐기 처분되었고, 그 자리는 죄다 다시 콘크리트 잡석으로 채워졌다.


나는 창문 앞에 서서 인간들이 저지르는 이 풍경을 바라본다.

단단하게 다져진 콘크리트 잡석 옆으로 야산에서 퍼다 놓은 흙이 노을에 물들고 있었다.

나는 글을 쓸 기운을 잃었고, 집에 있는 것도 싫어지기 시작했다.

며칠 지나자 흙더미에 섞여 있던 억새 뿌리에서 줄기가 쑥쑥 자라기 시작했다.

이대로 방치하면 저 억새는 흙의 영양분을 모조리 빨아먹으며 위풍당당한 점령군이 되리라.


억새를 싫어하진 않지만 내가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옆집이 어떻게 나올지 뻔히 보였다.

그들은 내게 보란 듯 억새가 자라던 곳을 포클레인으로 다시 파헤치고

그 자리에 또 콘크리트 잡석을 퍼부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다시 힘을 내야 했다.

마음에 끓어오르는 분노와 인간에 대한 환멸을 다독이며 생명에 물을 주는 손길로 나를 채워야 했다.


우리는 모두 알고 보면 이방인이다.

이방인으로 와서 주인행세를 하는 순간 평화는 깨진다.

그리하여 나는 내 영혼을 채우는데 힘쓰기로 한다. 그 방법 외에 이방인이 할 것이 무엇인가? 

(화내면 뭐하랴? 슬퍼하면 뭐하랴? 기쁨만이 유일하게 남는 것)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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