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페이지 유 Nov 08. 2022

참호 일기

신은 죽지 않았다.

2014. 10. 21

우리 모두 살아 있는 동안 

죽어 비로소 되는 존재로 가고 있다.


나는 아버지가 우습다

나는 어머니가 부끄럽다

나는 사랑이란 것 위에 똥을 누고 싶다


모든 고귀한 것들은 저 하늘에 떠다니고

나는 똥을 싸야 사는 존재 더미에 하나다


나의 신조는 

“울면서 왔지만 갈 때는 웃어야지”

똥 같은 세상을 떠나니 분명 웃겠지


파르랗던 시절엔 푸름이 무엇인지 모르고 

붉게 태우고만 싶었다. 


붉게 타오르는 지금은 

푸르게 살고 싶을 뿐이다


먹을 때는 몰랐던 똥의 실체

똥을 싸면 배가 고픈 삶의 실체



2022. 11. 6. 일요일.


나는 일기를 체계적으로 쓰지 않았다. 

그날그날 봐서 별 일이 없으면 쓰지 않았고, 쓸 일이 생겨도 쓰고 싶지 않으면 안 썼고, 모처럼 쓰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손을 뻗어서 마음에 드는 노트와 펜이 잡히지 않으면 쓰지 않았다.

왜 써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그래도 가끔씩이라도 이렇게 그날 하루의 흔적을 남겨놓은 걸 발견하게 되면 지금은 너무 기쁘다. 


이 노트는 일기장이다, 이렇게 정한 것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보물 1호는 늘 일기장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이사를 가고 나면 분실 1호가 일기장이 되고 보니 집착이 사라졌다고나 할까? 글을 쓸 때의 쾌감이 지나고 나면 글은 소용을 다 하고, 기록으로서의 일기장은 짝 잃은 양말처럼 되고 말았다. 

"글을 써서 뭘 할 거야?"    

이 말은 나 자신에게 건네는 독백이기도 했지만, 주위로부터도 귀에 박히게 들은 얘기다. 


그래도 일기를 썼다. 꾸준히는 아니지만 썼다.

왜 그랬는지 돌이켜보면 대화를 나눌 상대가 필요했다고 말할 수 있다. 아픈 나를 위해 따뜻한 말 한마디 남겨준 존재는 일기장이 유일했다. 세상은 왜 이렇게 나에게 차가웠던 걸까?  

이것도 돌이켜보면 삶은 나로 하여금 <어쨌거나 글을 쓰게> 만든 셈이다. 

그걸 어떻게 증명하냐고? 

이제 글을 쓰기 시작하니 주위에서 나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책을 읽는 것도 비슷하다.  삶은 나로 하여금 <어쨌거나 책을 읽게> 만들었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게 된 것은 나를 또 어느 방향으로 이끌게 될까? 이곳 세상을 돌아보면 그 자체로 신기하기도 하지만 (또 하나의 작은 우주 같음) 이곳에서 결국 나는 어떤 모습으로 죽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다. 

글이 살아 숨 쉬는 심장을 가지고 있다면 나름 필요한 곳으로 혈액을 나르고 있으리라.


언젠가 내가 쓴 책, 갈피에 이렇게 꽃을 올려놓는 독자가 있기를 상상한다.


오늘 저녁에 아내가 닭볶음탕을 끓여냈다. 그녀의 최근 최애 소주가 된 <새O> 가 밥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진수성찬이다. 


밥 먹으라는 말을 듣고 조르륵 달려가면 그날그날 밥상의 분위기를 읽는 게 습관이 되었다. 밥상을 읽으면 '오늘 아침은 아내의 기분이 별로구나.'  '오늘 저녁은 아내의 기분이 짱이로구나!' '오늘 저녁은 아내가 나에게 무슨 특별한 얘기를 하고 싶구나.' 이런 걸 짐작하게 된다.

오늘 저녁 아내는 밥상 위에 '우리 오늘 찐하게 대화하자! 할 얘기가 있어.'라고 쓰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첫 숟가락을 뜨기도 전에 첫 술을 마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함께 술잔을 비우며) 기다렸다는 듯이 나도 이렇게 대답했다.

"카! 이런 시간이 내가 기다리던 거야! 어서 말해 봐! 내가 질문 좋아하잖아. 도대체 뭐야?"


그녀는 나의 과도한 감탄에 놀라며 오버하지 말라고 한다. 나는 바로 진정했다. 그녀는 이어서 말한다.

"잘 먹고 잘 사는 게 뭘까?"


크! 내가 좋아하는 류의 질문 아닌가? 나는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 대답했다.

"보통 사람들에게 잘 먹고 잘 산다는 건 육체에게 뭘 해 주었느냐는 측면에서 말할 때가 많지. 지금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고, 몸을 위해 좋은 약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근육을 키우고 등등...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그건 너무 흔해.  흔한 건 싸구려야. 싸구려 삶은 잘 사는 거라고 말하기 힘들지. 

잘 먹고 잘 사는 건 진짜 나와 얼마나 가깝게 지내고 있느냐 하는 기준으로 접근해야 돼."


여기까지 말했을 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빈 잔에 소주를 따랐다. 내 잔에도 소주를 따라주었다. 더 이상 수다 떨지 말고 (입 닥치고) 자기 말을 들으라는 의미다. 나는 입을 닥쳤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역시 당신다운 대답을 하는군. 내가 그런 주제로 당신과 대화를 나누면 뭐 무슨 말을 하겠어? 그런데 난 이런 말을 하고 싶어. 요즘 드는 생각인데 말이야. 잘 먹고 잘 산다는 게 대단한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단 말이지. 우리 집도 그렇고 이렇게 먹는 밥상도 그렇고 함께 사는 식구도 그렇고 요즘 너무 좋거든? 봐봐! 이런 거!"


하며 그녀는 노을로 물들어 가는 마당을 소주잔으로 가리켰다.  나는 이때 닭볶음탕에 들어간 고구마 하나를 입에 넣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이후에 어떤 대화를 했는지 기억할 수 없다. 

 

아무튼 이렇게 저녁을 함께 먹은 우리는 평소보다 많은 술병을 비운 뒤, 마당으로 나가 텃밭 앞에 함께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이제 제대로 떡잎을 지우고 본잎을 내고 있는 채소들을 어루만지며 감탄의 호흡을 나누었다. 

우리는 이렇다 할 수입 없는 생활을 수년 째 이어오고 있지만 미래에 대한 걱정은 지운 지 오래다. (아니, 겉으로는 당당한데 솔직히 최근 들어.... 이 여정의 뒤쓰레질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아 찝찝하다. 그녀는 아직도 대장부처럼 씩씩하다.) 


그런데 이곳저곳 뒤지다 발견한 2014년 10월의 일기를 읽어보니 이런 문구가 나오지 않는가?

"먹을 때는 몰랐던 똥의 실체, 똥을 싸면 배가 고픈 삶의 실체"


참 재밌는 경험이다. 니체의 입은 싸구려다. 

신은 분명 살아있다. 

작가의 이전글 참호 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