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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유 Dec 16. 2022

참호 일기

다섯 살로 죽어라

2022. 12. 03.

겨울이 왔구나.

겨울이 오면 북악산 생각이 난다.

하얀 도화지에 소나무 몇 그루 그린 풍경 속 고향.


어릴 때 우린 매년 겨울, 연탄 연기에 질식하곤 했다. 그래서 깨진 창문을 그대로 두었다. 나중에 테이프로 대충 틀어막긴 했지만....


아무튼 방바닥은 시커멓게 탈 정도로 뜨겁지만, 공기는 서리가 열 것 같은 방에서 겨울밤을 보냈다.

하지만 춥다는 기억은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가족 간에 유대가 돈독하지도 않았는데 춥지 않았다.

날이 밝으면 기대할 아주 작은 것 하나만 있어도 따뜻한 꿈을 꾸며 잠을 잤다.  


눈이 소복 쌓인 뒷산에 올라 친구들과 놀다 보면 해가 저물었다.

어머니께서 땅에 묻은 장독대로 총총 달려가 김치를 꺼내오면 눈길에 떨어진 김치 국물에 줄기를 그려 장미를 그렸다.

하얀 눈을 밟고 아버지가 출근구두 발자국에 도토리 열매 두 개를 올려놓았다. 그러면 화를 내는 아버지가 아니라 상상 속 다정한 아빠가 되었다.

늘 콧물을 흘리며 지냈지만 콧물이 얼어도 시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제주도에서 난 어떤 겨울을 나고 있나?

난 5백 년 된 종가시 나무 아래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서재의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은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모네의 그림처럼 풍성하다.

광나무, 까마귀쪽나무, 종가시 나무, 백서향, 대나무, 소나무, 푸조나무, 느릅나무, 보리수, 립 세이지, 극락조, 처녀치마, 수선화, 만리향 나무, 은목서, 로즈메리, 홍가시나무, 귤나무, 동백나무는 겨울 내내 푸름을 유지하겠지. (겨울엔 수국이 제일 볼 품 없음)

먼나무, 꽃사과나무, 무화과엔 빨간 열매가 꽃처럼 매달려 있다. 이 와중에 백서향과 로즈메리는 꽃 봉오리를 내는 중이다. 립 세이지는 지난봄에 낸 꽃을 아직도 피우고 있다. 백서향이 질 무렵이 오면 동백과 매화가 절정을 이루고 텃밭에 심은 유채도 꽃을 피울 것이다.


겨울과 가장 먼 계절에 핀다.


하지만 어릴 때 나와 비교하면 지금 나의 상상력은 얼마나 창백한가?

어릴 때 겨울과 비교하면 지금 나의 겨울은 얼마나 초라한가?


무엇보다 지금 나는 춥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이가 되어 병든 몸을 이끌고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렇게 일기를 쓰는 일 외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어쩌면 이 또한 나의 착각일지 모른다.

나이에 대한 확증편향이 발현된 것일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었으니 상상력은 형편없어졌다거나, 나이가 들었으니 허황된 꿈은 꾸지 말고 정원의 꽃이나 보고 살아야지, 하는 따위의 확증편향 말이다.


어릴 때 누리던 상상의 삶을 가져와야 한다.

나이는 잊어라. 죽을 때 5살로 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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