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일 것인가

왕의 박제된 신체와 <킹덤>의 생물학적 통치학

by 박현민

과거의 권력이 '죽이는 힘'이었다면, 현대의 권력은 '살게 만드는 힘'이다. 미셸 푸코는 이 명제 뒤에 숨은 서늘한 역설을 경고했다. 2019년 초 넷플릭스 시리즈 <킹덤>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만 해도 이 작품은 해외 타깃으로 적절한 영리한 장르물로 소비됐다. 그러나 이듬해인 2020년, 미증유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멈춰 세운 순간 상황은 급변했다. 생존을 위해 자신의 생물학적 정보를 국가에 헌납하고, 누군가의 삶이 통계 수치로 치환되는 광경은 500년 전 조선의 그것과 기묘하게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푸코가 말한 '생명정치'의 그늘이 드라마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 곁에 당도한 것이다. <킹덤>의 좀비는 권력이 생명을 어떻게 등급 매기고 통제하는지를 폭로하는, 비린내 나는 '나쁜 진실' 그 자체다. 그리고 그 좀비의 본질은 단순히 흉측한 괴물이 아니라, 주권권력과 생명권력 사이의 경계에 붙잡혀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부유하는 신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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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1976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연에서 당시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의 죽음을 하나의 상징적 사건으로 불러온다. 수십 년간 절대적 생사여탈권을 휘두른 주권자였던 프랑코는, 정작 자신의 임종 앞에서 현대 의료 기술이라는 생명정치 시스템에 포획되었다. 생물학적으로는 이미 죽었어야 할 신체가, 살아 있는 개인들을 '생물학적으로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의 반대편에서 도리어 기계에 의해 강제로 존속되는 아이러니. 푸코는 이것을 "사소하지만 유쾌한 사건(minor but joyous event)"이라 부른다. 죽음마저 권력의 관리 대상이 된 이 전도된 풍경을 두고 그가 씁쓸한 웃음을 감추지 않는다는 사실은, 생명정치의 역설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킹덤>의 왕이 바로 이 표상을 체현한다. 영의정 조학주(류승룡)는 왕위 계승이라는 정치적 안정을 위해 생사초를 동원해 죽은 왕을 '생사역'으로 부활시킨다. 인격은 소멸했으나 시스템의 필요에 의해 심장만 뛰는 왕의 신체는, 이제 주권자가 아닌 생명정치가 관리하는 '생물학적 감옥'에 갇힌 박제일 뿐이다. 그는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권력의 도구로 유지된다. 프랑코와 왕, 이 두 신체는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지만 동일한 논리 위에 놓인다. 살아 있음이 인간적 존엄의 증거가 아니라 정치적 목적의 수단이 될 때, 생명권력은 그 본색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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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적 공포의 진정한 심연은 왕의 침소가 아니라, 역병 환자들의 시신을 처리하는 관아의 마당에서 드러난다. 3회에는 유독 기이한 장면이 등장한다. 살아 있는 자를 위협하는 존재가 된 시체들을 불태워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 모두가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누군가는 끝내 이를 반대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이니, 태울 수 없다는 것.

본래 이 문장은 효경(孝經)의 윤리다. 몸과 머리카락, 피부는 부모에게 받은 것이니 훼손하지 말라는 가장 기본적인 효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해당 장면에서 그 말은 더 이상 윤리가 아니다. 그것은 선택적으로 호출되는 논리, 정확히는 양반이라는 신분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에 가깝다. 인간의 경계를 벗어난 시체 앞에서조차 그들은 여전히 '양반의 몸'을 이야기한다. 살아 있을 때의 위계는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어야 하고, 타인을 위협하는 존재가 된 이후에도 훼손될 수 없는 성역으로 남아야 한다는 집착이다. 그 순간 신체는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계급의 표식이자 권력의 흔적이 된다.

009.jpg 넷플릭스 시리즈 <킹덤> 스틸

푸코에 따르면 인종주의는 민족 간의 갈등이 아닌, 단일한 생물학적 장(場) 안에서 "누가 살아야 하고 누가 죽어야 하는가"를 가르는 단절(Caesura)을 도입하는 기술이다. 조선의 신분제는 푸코적 의미의 생물학적 인종주의와 동일하지 않다. 그것은 예(禮)와 명분의 질서 위에 세워진 체제다. 그러나 <킹덤>의 재난 상황에서 신분제는 다른 방식으로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시신의 처리 방식을 신분에 따라 달리하라는 요구는, 같은 조선인이라는 '인구' 내부에서 보존되어야 할 생명과 방치되어도 좋을 생명을 나누는 정치적 선언으로 작동한다. 윤리는 원칙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호출되는 권력의 언어로 전락한다. 시체를 태우지 않으면 더 많은 이들이 죽는다는 자명한 사실 앞에서도 그들은 불을 붙이지 못한다. 질서는 생존보다 앞선다.

이 선별적 가치 부여는 유일한 피난선에 양반들만 올라타 주민들을 '죽게 내버려 두는' 비겁한 도주로 완성된다. 푸코는 권력이 특정 집단을 살리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서도, 역설적으로 다른 집단을 죽이거나 방치할 때 생물학적·사회적 단절의 논리를 동원한다고 지적한다. 배 위에 올라탄 양반들이 아랫것들의 분투를 외면하며 자신들만의 안전을 도모하는 장면은, 권력이 보호하고자 하는 '사회'가 결코 모두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서늘한 진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집착은 스스로를 파멸시킨다. 시신을 불태우지 않고 배에 실어 간 양반의 특권 의식은 결국 배 안의 모든 이들을 좀비로 만드는 자살적 파멸로 이어진다. 나치즘을 분석하며 푸코가 지적했듯, 생명을 관리하고 증식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 권력이 '나쁜 생명'의 제거를 정당화하는 순간,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한 칼날이 된다. 나치 국가가 타 민족의 절멸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자국민 전체를 절대적 죽음의 위험에 노출시켰듯, 배 위의 양반들은 자신들만의 생존을 확보하려다 스스로 좀비가 된다. 타자의 생명을 부정하는 것이 자기 생명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이 역설은, 생명정치의 논리가 내장한 가장 치명적인 모순이다.

011.jpg 넷플릭스 시리즈 <킹덤> 스틸

좀비를 다시 떠올려보자. 그것은 살아 있지만 살아 있지 않고, 죽었지만 죽지 않은 존재다. 주권권력이 다스리던 세계에서 죽음은 권력 이양의 장엄한 의식이었다. 그러나 생명권력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죽음은 사적이고 은밀한 사건으로 후퇴하고, 좀비처럼 삶과 죽음 사이에 걸린 존재들이 넘쳐난다. 결국 〈킹덤〉이 목격하게 하는 것은 역병 그 자체가 아니라, 거대한 재난 앞에서도 결코 해체되지 않는 견고한 위계의 공포다. 누군가의 시신은 반드시 보존되어야 할 '존엄'으로, 또 다른 누군가의 시신은 다 태워져야 할 '위험'으로 분류되는 그 저울 위에서, 공동체의 안녕은 설 자리를 잃는다. 지옥은 굶주린 괴물들의 습격이 아니라, 그 아비규환 속에서도 누구의 생명이 더 무거운지를 계산하고 있는 권력의 차가운 시선 속에 존재한다.



[참고문헌]

Foucault, Michel. "Society Must Be Defended": Lectures at the Collège de France, 1975-76. Translated by David Macey, Picador,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