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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민 Nov 01. 2020

결벽주의자+결벽주의자

같은 맛

난 결벽주의자다.


어릴 적은 이게 꽤 심각했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타인이 썼던 물건을 그 상태 그대로 사용하지 못할 정도. 단순한 워딩으로만 보면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그게 실생활로 넘어가면 전혀 그렇지 못하다. 학창 시절 책걸상을 사용하지 못해서 앉기 전에 수십 번을 닦아내는 작업을 반복해야 했다. 남이 건네준 펜이나 지우개도 맨손으로 바로 잡지 못했다. 누구와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그러니깐 내게는 크나큰 고통이었다.


물론 이것이 통용되는 것은 어릴 적에 한해서다. 성장할수록 그런 성향을 그대로 드러냈다가는 아무래도 철저한 '왕따'가 될 거 같았으니깐. 무척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이성적 판단이, 결벽을 원하는 본능보다 앞섰다. 학교를 지나 사회에 나가면서 이것은 더욱 굳건해졌다. 타인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을 만큼의 결벽증. 이것이 내게 허용된 전부였다. (여전히 하루에 손은 50~100번 정도 씻는 것 같지만...)


창문으로 보이는 저 반듯반듯한 건물들처럼, 우리 집의 모든 것들도 완벽히 각이 잡혀있길 바란다. ⓒ박현민


그러니 적어도 내 영역만큼은, 누군가가 더럽히지 않길 바랐다. 살균 소독을 하는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가급적 흐트러지지 않는 정돈된 깨끗한 나만의 공간이 좋았다.


"혼자 사는 집이 이렇게 깨끗해?"


가족이나 친구들이 집에 잠깐 들어오더라도, 언제나 나는 그런 부분에 있어 자부심이 가득했다. 결벽과 함께 탑재한 정리벽 역시 함께 시너지를 냈다. 냉장고 속 모든 음료도 가지런히 상표가 한 방향을 보고 있어야 비로소 안심이 됐다. (아니, 근데 큰 에너지도 소모되지 않는 이 간단한 것을 어떻게 사람들은 하지 않고 지낸단 말인가.)


언젠가 지금의 아내가 집에 놀러 온 적이 있다. 아내는 내 첫 직장의 동기이기도 했고, 10년이 된 친구이기도 했다. 서로의 연애사도 공유할 정도로 나름 가까웠던 사이.


"냉장고 손잡이 위에 먼지는 안 닦았네?"


처음으로 집안에 들어온 누군가에게 칭찬이 아닌 지적이 나왔다. 기분이 나빴냐고? 아니, 전혀. 오히려 사회에 찌들며 자칫 잃어버릴 뻔한 내 본성이 눈을 떴다. '내가 너무 청소에 나태해져 있었구나!' 하고.


이날의 일은 이후 내게 큰 영향을 끼쳤다. 비혼주의자의 삶을 청산하고 결혼을 선택하게 된 것은, 그 상대가 그때 내 냉장고 손잡이 위 먼지를 지적한 인물과 동일했기에 (아마도) 가능했다. 적어도 한 공간을 써야 하는 사람이라면 집안 먼지에 대해 진지한 논의가 가능한 대상이었으면 했다. 하루의 시작은 청소기로, 하루의 끝은 정리정돈으로 마무리되길 바랐다.


결혼한 지금, 우리의 행복은 '대청소'다.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두 번의 청소를 하고 있지만, 묵은 때를 벗겨내는 것은 주말 대청소만큼 상쾌한 일이 없다. 구석구석의 먼지를 빨아내고, 바닥 곳곳을 물걸레로 닦아내는 일. 보이지 않는 집먼지를 잡고, 곳곳에 포진된 생활 먼지를 살균하는 일. 이것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몹시 행복한 일이다. 둘 다 은퇴하면, 소규모 청소업체를 차려서 이곳저곳 쓸고 닦고 정리하는 일을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를 한 적도 있을 정도.

청소를 끝내고 상큼한 마음으로 먹는 와인 ⓒ박현민


언젠가 마주 앉아서 우리의 다른 점을 꼽아본 적이 있는데, 세다가 끝도 없어서 도중 포기한 적이 있다. 그 많은 다른 점들을 모두 다 뚫고 우리가 제대로 의기투합할 수 있는 것은, 결벽증, 그거면 일단 충분했다.


어쩌면 하나밖에 없을지도 모를, 우리의 같은 맛이 나는 꽤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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