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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민 Nov 01. 2020

시월드는 없다

독립한 성인의 삶에 대해서

결혼이 싫었던 이유 중 하나는, 불합리한 결혼 제도와 관습 때문이다.


동등한 성인 남녀가 결혼을 하고 가족이 되는 과정에서, 시댁과 처가가 시작부터 지나치게 불균형한 관계로 설정되는 대한민국 결혼 문화가 아무래도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고정된 모양새로 그려지는 그것을 보면서, 영 찜찜했던 기억이 있다. 분노의 김치 싸대기까지 때리지 않더라도, 남자와 여자가 상대방의 가족과 집에서 부여받는 불편함의 강도가 분명하게 상이했다.


어릴 적 우리 부모님의 삶도 이를 벗어나지 않았다. 시댁이 우선이고 처가는 그다음. 엄마를 낳아주신 엄마는 따로 있는데, 엄마는 남편의 엄마를 친엄마보다 더 극진하게 모셨다. 싫은 내색도 하나 없이. 참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광경이었다. 사실은 생판 남이지 않나?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아주 당연하다고 했다. 그것도 요상했다. 내 부모보다 네 부모한테 잘해야 한다니.


"왜 나만 이렇게 일을 해야 하지?"


언젠가 엄마가 이런 것의 부당함에 대해 식탁에서 토로한 적이 있다. 남자가 밖에서 일하고, 여자가 안에서 모든 살림을 도맡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집안일을 모르고 살았던 아빠는 마음을 고쳐먹은 이후에도 집안일에 별다른 보탬이 되진 않았다. (다행히 그 사건 이후 시댁의 조상까지 모시는 제사는 쭉 생략했다.)


그러니깐 어릴 적부터 내가 보고 겪은 결혼 제도는 이상한 것들 투성이었다. 그렇게 아마 자연스럽게 비혼주의자가 되었던 게 아닐까. 자처해서 '이상한 나라'로 빠져들 필요가 없어 보였으니깐. 굳이?


그런 내가 결혼을 덜컥했다. 물론 (옛날 사람인) 부모님은 크게 기뻐했다. 우리 집 삼 남매 중 유일하게 결혼을 한 사람이 됐으니깐.


결혼을 결심하면서 간절했던 것은 '시월드'를 우리 결혼 안으로 끌어들이지 않는 것. 평소 집에 연락도 하지 않던 남자들이 결혼 후 아내에 빌붙어 효자가 되는 것만큼 해괴한 일을, 죽어도 따르고 싶지 않았다.


처가로 가는 길 ⓒ박현민


결혼한 지 2년 동안, 결혼 후 고향집은 딱 한 번 내려갔다. 그것도 나 혼자서. 코로나도 큰 영향을 끼쳤다. 적절한 핑계가, 나를 지독한 불효자 카테고리로는 등 떠밀지 않았다. 이것은 엄연히 연로한 부모님의 건강을 염려한, 일종의 방패 같은 것이기도 했으니깐 말이다.


아내는 서울 태생이라 종종 처가에 놀러 간다. 같이 가는 경우는 명절 정도이고, 평소 주말엔 혼자 가서 쉬고 돌아온다. 그 주말의 시간에, 나는 나의 시간을 보낸다. 아내도 나랑 같이 가는 것보다, 자신이 살았던 집에, 자신의 부모님과 좀 더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테니깐.


이 역시 불공평하지 않냐고? 사회가 강압적으로 들이미는 관계 구성을 벗어났을 뿐, 우리의 결정은 분명 합리적이다. 거리적인 측면도 있고, 결혼이 기존 관계를 크게 뒤흔들지 않았으면 했다는 기존의 바람과도 맞아떨어진다.


아내는 본디 가족과 살갑게 지냈고, 난 원래 가족과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성인이 된 이후 본가와 철저하게 (물론 경제적으로도) 독립된 삶을 살아왔다. 이러한 인생의 축적은, 약간의 불효자 타이틀을 꿰찬 대신 '시월드'의 급습을 효율적으로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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