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별에 대하여
대부분의 인간 관계에서는 권력을 가진 자(갑)와 가지지 못한 자(을)가 생긴다. 상사와 부하처럼 누가봐도 명확하게 보이는 관계가 아니라면 대부분 누가 더 좋아하는가, 가 원인이 된다. 보통 덜 좋아하는 사람은 관계의 모든 것에 예민해진다. 그 사람이 하는 말, 그 사람이 보낸 문자, 나를 보는 시선, 둘 사이의 공기에서 시작과 끝과 멈춤과 흔들림을 감지해낸다. 더 예민하기 때문에 더 잘 보이고, 더 잘 보이기 때문에 더 예민해질 수 밖에 없다.
한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하려한다. 그 친구는 인간관계에 꽤 쿨한 편이었다. 관계란 것이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갈 사람은 갈 것이고, 남는 사람은 남을 것이라고. 사람과 사람은 1+1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이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끊임없이 끼어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그 친구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 건 어떤 사람을 알게되고 부터였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진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했다. 그 사람의 아침과 점심과 저녁이, 그 사이에 하는 생각들이 궁금해졌다고. 내가 모르는 그 사람의 세계가 너무나 알고 싶다고. 때로는 그 사람이 없는 자신의 시간이 아무 의미 없이 느껴진다고 했다.
사람은 때로 갑이 되고 또 때로는 을이 된다. 내가 갑이었을 때 몰랐던 모습을 을이 되어 발견하기도 한다. 내가 갑이었을 때 이해하지 못했던 을의 행동이, 내가 을의 입장이 되고서야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자연스럽게 친구는 관계의 을이 되어갔다. 처음으로 을이 되어본 친구는, 을의 세계에서 꽤 오랜 시간을 헤맸다.
사람의 관계는 언제 끝이 날까. 친구는 말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 사이에 '다음'이 없더라고. 시간이 안 맞아서 밥을 못 먹을 수도 있고, 영화를 못 볼 수도 있고, 약속이 취소될 수도 있는데 그 사람이 '그럼 다음 번에'라는 말을 절대 하지 않는거야. 그냥 그 순간이 끝나고 나면 진짜로 그 상황은 끝나버리는 거더라고. 다음에 어디어디를 갈래요? 라고 물으면 아 그 때 상황봐서요, 라고 대답해. 절대 다음을 약속하지 않아." 과거와 현재만 있는 관계. 다음이 없는 관계. 그 아득함 속에서 친구는 망설이고 망설였다. 내가 더 좋아하기 때문에 오버해서 생각하는 건 아닐까, 하고. 그냥 이 사람에게 다음이 중요하지 않은 것 뿐일수도 있잖아, 하고.
그 사람은 과거의 친구같은 사람이었다. 과거의 자신같은 그 사람에게 친구는 질문을 했다. "당신의 삶에서 나는 중요하지 않은가요?", "왜 당신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나요?", "왜 당신은 다음을 이야기하지 않나요?" 그리고 과거의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했던 과거의 을들을 떠올렸다. 그 사람은 대답했다. "그런 질문을 왜 하는 거죠?" "모든 것을 표현해야만 하는 건가요? 진정한 관계는 표현하지 않고도 전해지는 것 아닌가요?". 과거의 자신이 했던 말이었다. 과거의 자신이 그랬기 때문에 친구는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의 문장 속에 진심이 담겨있지 않다는 것을. 지금 나의 질문에 신경쓰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 질문이, 이 관계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어색한 지금을 모면하려고 한다거나 지금 이 순간을 쉽게 넘기고픈 마음마저 없다는 것을. 친구는 대답을 들으면서 깨달았다고 했다. 아, 그래서 당신에겐 다음이 없었던 거군요. 다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부담스웠던 게 아니라 다음을 이야기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이군요.
두 사람 사이에서 어느 한 부분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 그것을 붙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붙이더라도 물이 새지 않을 뿐 금이 갔던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을의 세계에 머문채, 다음을 듣지 못한 그 친구는 가슴에 실금을 남긴 채 관계를 끝냈다. 그 이후, 다음이 없는 관계에 대해 자주 떠올려보게 된다. 오늘도 무의미한 약속을 수없이 했는데, 왜 어떤 관계에서는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일까에 대해. 그것은 갑의 문제일까, 을의 문제일까, 관계의 문제일까에 대해. 사람과 사람은 1+1이 아니기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끼어들 수 밖에 없는데, 미래가 없는 것이란 어떤 소용이 있을까에 대해. 때로는 갑의 위치에서 때로는 을의 위치에서 우리는 관계를 만들어간다. 쉽게 다음을 약속하고, 쉽게 다음을 약속하지 않으면서. 그것 때문에 가끔 행복하고 대부분 불행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