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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영제 Jul 16. 2019

'다음'을 약속하지 않는 관계에 대해   

어떤 이별에 대하여 

대부분의 인간 관계에서는 권력을 가진 자(갑)와 가지지 못한 자(을)가 생긴다. 상사와 부하처럼 누가봐도 명확하게 보이는 관계가 아니라면 대부분 누가 더 좋아하는가, 가 원인이 된다. 보통 덜 좋아하는 사람은 관계의 모든 것에 예민해진다. 그 사람이 하는 말, 그 사람이 보낸  문자, 나를 보는 시선, 둘 사이의 공기에서 시작과 끝과 멈춤과 흔들림을 감지해낸다. 더 예민하기 때문에 더 잘 보이고, 더 잘 보이기 때문에 더 예민해질 수 밖에 없다.


한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하려한다. 그 친구는 인간관계에 꽤 쿨한 편이었다. 관계란 것이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갈 사람은 갈 것이고, 남는 사람은 남을 것이라고. 사람과 사람은 1+1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이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끊임없이 끼어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그 친구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 건 어떤 사람을 알게되고 부터였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진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했다. 그 사람의 아침과 점심과 저녁이, 그 사이에 하는 생각들이 궁금해졌다고. 내가 모르는 그 사람의 세계가 너무나 알고 싶다고. 때로는 그 사람이 없는 자신의 시간이 아무 의미 없이 느껴진다고 했다. 


사람은 때로 갑이 되고 또 때로는 을이 된다. 내가 갑이었을 때 몰랐던 모습을 을이 되어 발견하기도 한다. 내가 갑이었을 때 이해하지 못했던 을의 행동이, 내가 을의 입장이 되고서야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자연스럽게 친구는 관계의 을이 되어갔다. 처음으로 을이 되어본 친구는, 을의 세계에서 꽤 오랜 시간을 헤맸다.


사람의 관계는 언제 끝이 날까. 친구는 말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 사이에 '다음'이 없더라고. 시간이 안 맞아서 밥을 못 먹을 수도 있고, 영화를 못 볼 수도 있고, 약속이 취소될 수도 있는데 그 사람이 '그럼 다음 번에'라는 말을 절대 하지 않는거야. 그냥 그 순간이 끝나고 나면 진짜로 그 상황은 끝나버리는 거더라고. 다음에 어디어디를 갈래요? 라고 물으면 아 그 때 상황봐서요, 라고 대답해. 절대 다음을 약속하지 않아." 과거와 현재만 있는 관계. 다음이 없는 관계. 그 아득함 속에서 친구는 망설이고 망설였다. 내가 더 좋아하기 때문에 오버해서 생각하는 건 아닐까, 하고. 그냥 이 사람에게 다음이 중요하지 않은 것 뿐일수도 있잖아, 하고. 


그 사람은 과거의 친구같은 사람이었다. 과거의 자신같은 그 사람에게 친구는 질문을 했다. "당신의 삶에서 나는 중요하지 않은가요?", "왜 당신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나요?", "왜 당신은 다음을 이야기하지 않나요?" 그리고 과거의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했던 과거의 을들을 떠올렸다. 그 사람은 대답했다. "그런 질문을 왜 하는 거죠?" "모든 것을 표현해야만 하는 건가요? 진정한 관계는 표현하지 않고도 전해지는 것 아닌가요?". 과거의 자신이 했던 말이었다. 과거의 자신이 그랬기 때문에 친구는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의 문장 속에 진심이 담겨있지 않다는 것을. 지금 나의 질문에 신경쓰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 질문이, 이 관계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어색한 지금을 모면하려고 한다거나 지금 이 순간을 쉽게 넘기고픈 마음마저 없다는 것을. 친구는 대답을 들으면서 깨달았다고 했다. 아, 그래서 당신에겐 다음이 없었던 거군요. 다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부담스웠던 게 아니라 다음을 이야기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이군요. 


두 사람 사이에서 어느 한 부분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 그것을 붙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붙이더라도 물이 새지 않을 뿐 금이 갔던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을의 세계에 머문채, 다음을 듣지 못한 그 친구는 가슴에 실금을 남긴 채 관계를 끝냈다. 그 이후, 다음이 없는 관계에 대해 자주 떠올려보게 된다. 오늘도 무의미한 약속을 수없이 했는데, 왜 어떤 관계에서는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일까에 대해. 그것은 갑의 문제일까, 을의 문제일까, 관계의 문제일까에 대해. 사람과 사람은 1+1이 아니기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끼어들 수 밖에 없는데, 미래가 없는 것이란 어떤 소용이 있을까에 대해. 때로는 갑의 위치에서 때로는 을의 위치에서 우리는 관계를 만들어간다. 쉽게 다음을 약속하고, 쉽게 다음을 약속하지 않으면서. 그것 때문에 가끔 행복하고 대부분 불행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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