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아 검사 없이 출산하기
나는 두번의 출산을 했다. 첫째는 일본에서, 둘째는 한국에서 낳았다. 출산은 나라가 달라도 결국 한 생명을 품어내는 일이다. 하지만 그 과정을 둘러싼 사람들의 태도와 의료 시스템의 온도는 분명히 달랐다. 일본의 산부인과는 자연주의 출산과 별반 다르지 않았고, 한국의 산부인과는 빨리빨리의 민족답게 빠르고 편했다.
한국에서는 임신 중 두 차례의 기형아 검사와 정밀 초음파 등 여러 검사를 받는 것이 비교적 일반적인 흐름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일본에서는 임신 초기 목투명대 검사와 중간중간 진행되는 간단한 초음파, 그리고 심박수를 확인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검사가 거의 없었다. 별다른 이상이 보이지 않으면 정상입니다라는 말 한마디로 진료가 끝나곤 했다. 목투명대 검사 역시 정확한 수치조차 알려주지 않는 병원도 적지 않다.
임신 중기에 접어들 무렵, 한국의 맘까페를 찾아보다가 노산일 경우 대부분 이런저런 추가 검사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마음 한편에 불안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대로 아무 검사도 받지 않은 채 아이를 낳았다가, 혹시라도 이상이 있다고 하면 어쩌지. 염색체 이상을 가진 아이가 태어난다면 과연 나는 그 삶을 감당할 수 있을까. 초보 엄마다운 걱정과 두려움이 하루하루 마음을 잠식해 갔다. 상상에서 시작된 부정적인 생각들은 좀처럼 멈출 생각이 없었다.
불안한 마음을 남편에게 털어놓고 출산을 하기로 한 병원에도 문의했다. 일본에도 쿼드검사가 있기는 했지만 우리가 다니는 병원에서는 시행하지 않았고, 검사를 받으려면 병원을 옮기거나 검사를 전문으로 하는 병원이나 기관을 찾아가야 했다. 검사비용 또한 무척이나 높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국 우리 부부는 기형아 검사는 확률로 정해지는 결과의 불명확함을 인지하고 충분히 상의한 끝에 검사를 받지 않았지만, 일본에서는 이러한 검사를 선택할 경우 한국보다 높은 비용과 시간이 드는것을 알게되었다.
일본 사회에는 여전히 태어날 생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정서가 비교적 깊게 남아 있다. 기형아 검사가 존재하긴 하지만, 검사 대상이 제한적이거나 의료진이 먼저 권하지 않는 분위기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2013년 일본에도 NIPT 검사가 도입되었지만, 이 검사가 태아의 생명을 선택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우려 속에서 국가 역시 매우 신중한 태도를 유지해 왔다. 윤리적 논란 속에서 전국적으로 보편화되지 않은 상태로, 현재도 일부 인증된 병원에서 임신부가 자비로 선택해 검사를 받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의사가 특별히 필요하다고 판단하지 않는 한, 고령의 산모라 하더라도 검사를 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결국 나는 조금 늦은 감이 있었지만 한국에 갈 일이 생겨 산부인과에서 정밀 초음파 검사를 받았다. 아이의 손가락과 발가락은 열 개씩 잘 갖추어져 있었고, 좌뇌와 우뇌도 고르게 형성되어 있었다. 심장의 모양은 정상이며 척추와 장기의 위치 역시 모두 문제 없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적은 비용으로도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고, 엄마로서 최소한의 도리는 다한 것 같아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본에서는 임신부터 출산까지의 모든 과정이 과함 없이 자연스러움을 지향한다. 아이와 산모에 대한 검사 역시 최소한의 범위 안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 한국에서는 확률에 따라 위험군을 나누고, 경우에 따라 양수검사까지 이어지는 일도 더러 있다고 들었다. 나는 결국 검사를 받지 않았지만 그 선택이 옳았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는 것이 현명한 엄마의 선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연 결과를 아는 것이 꼭 안심이 되는 일일까. 그 결과가 오히려 또 다른 불안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결국 한 생명이 태어난다는 일은 어쩌면 믿음에서 시작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 질문들 사이에서 나는 꽤 오랫동안 머물렀다.
첫째의 출산은 일본에서 남편과 단둘이 하게 되었다. 무통 주사도 관장도 없이 열두 시간에 가까운 산고를 온몸으로 고스란히 겪은 끝에 나는 첫아이를 품에 안았다. 2018년, 한 해가 저물어가던 무렵이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가진통이 시작되었고, 입원하라는 병원의 안내에 따라 서둘러 짐을 챙겨 병원으로 향했다. 밤이 깊어지자 본격적인 진통이 시작되었다.
아무도 없는 병실에서 나는 오로지 혼자 그 시간을 견뎌야 했다.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줄로만 알았다. 남편도 없이 허리를 칼로 베어내는 듯한 통증을 안고 병실 바닥을 기어다녔다. 말이 되지 않는 고통에 간호사를 불러보았지만 돌아오는 말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말 뿐이었다. 잠을 잘 수도 없는 진통을 견디다 보니 어느새 새벽 다섯시. 너무 아파 눕지도 서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자세로 병실을 걷고 있을 때였다. 무언가 아래로 흐르는 느낌이 스쳤고, 나는 그렇게 분만실로 옮겨졌다. 해가 막 떠오를 무렵, 집에서 마음을 졸이며 자는 둥 마는 둥 했을 남편도 그제야 병원에 도착했다.
일본에서의 출산에는 관장도, 제모도 없었으며 진통이 올때마다 이를 악물고 힘을 주어 아이를 밀어내야 했다. 문득 사극 속 장면이 떠올랐다. 흰 한복을 입고, 입술이 파래진 채 아이를 낳던 여인들. 내가 지금 그들과 무엇이 다를까 싶었다. 구들장이 아닌 현대식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 말고는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몇 번이고 힘을 주었지만 지금도 머리가 동그랗고 예쁜 나의 아들은 좀처럼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위에서 눌러도, 아래에서 잡아 당겨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정말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끝없이 이어진 진통과 탈수로 몸에는 더 이상 내어줄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쯤에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차라리 수술을 해달라고 말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 스칠 즈음이었다. 옆에서 쉼없이 일본어로 응원을 보내던 간호사들, 그리고 끝까지 곁을 지켜준 남편 덕분에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모아 다시 한 번 밀어냈다.
그제서야 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진통이 시작된 지 거의 열두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세상에 나온 작고 붉은 아이를 바라보며 겨우 옅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몸 속 세포 하나하나에 남아 있던 힘까지 모두 써버린 느낌이었다.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군인처럼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물만 마셔댔다.
배에는 시퍼렇게 멍자국이 남아 있었다. 밥이 나왔지만 입에 대고 싶은 마음은 들지않았고 그저 자고 싶었다. 너무, 너무 힘들었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이미 이 과정을 겪어냈다 생각하니 존경심과 함께 어딘가 모르게 묘한 배신감 같은 감정이 동시에 밀려왔다. 열 달 동안 품어온 나의 첫 아이가 드디어 세상에 나왔지만, 엄청난 감동은 잠시 뒤로 밀려났고, 나는 출산의 고통 속에서 거의 기절하다시피 했다.
그 뒤로의 기억은 흐릿하다. 병원 밥이 의외로 맛있었다는 것, 배고프다며 우는 아이를 잠깐씩 안아볼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남편이 집에서 끓여다 준 미역국을 먹으며 하루하루를 지냈다는 정도만 남아 있다.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일본의 병원은 조리원이 아니라 회복 후 곧바로 일상으로 돌아가는 개념에 더 가까워 어쩔 수 없는 일이였다.
그렇게 출산 일주일 만에 부부 둘만의 신생아 육아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이제 만 일곱살이 되었다. 입덧도 출산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타지에서 처음 해보는 육아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둘째는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새 내 나이는 곧 서른일곱을 앞두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아들을 또 낳을까, 다시 그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까 조금은 두려웠지만 그래도 나는 한번 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둘째 출산을 위해 한국으로 들어가야 할 무렵, 코로나라는 무서운 역병이 세상을 빠르게 잠식해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가야만 했다. 내가 사는곳은 한국의 전주정도 되는 크기의 카나자와라는 일본의 작은 소도시로, 코로나로 인해 서울로 향하던 직항편은 이미 사라졌고, 다른 도시를 거쳐야만 한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는 오사카를 통해 들어가기로 했다. 아침 비행기를 타기 위해 깜깜하다 못해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새벽 세 시, 잠든 아이를 안고 집을 나섰다. 다섯 시간을 차로 달려 오사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만삭의 몸으로 세돌도 채 되지 않은 첫째를 데리고 혼자 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겁이 났지만 나는 엄마다. 엄마니까 하는거다.
나에게 있어 늘 다정하고 세심한 엄마 아빠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친정에 오니 마음이 한결 편안하고 좋았다. 첫째 아이를 예뻐해 주는 엄마 덕분에 육아도 한결 수월했고, 자가격리의 시간 역시 생각보다 견딜 만했다. 한국에 온 김에 머리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고 출산 전 충분히 쉬었다 싶을 무렵 예정일을 하루 넘긴 날, 드디어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인해 보호자는 병원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고, 아빠는 나를 병원 앞에 내려주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셨다. 이제 혼자서 아이를 낳는다. 이래서 경력직을 원하나 싶었다. 첫째 때와는 달리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차분했고 자신만만한, 아주 여유로운 출산 준비였다. 분만실에 누워 관장도 하고 제모도 하고, 무통주사 설치까지 마치고 나니 본격적인 진통이 시작되었다. 진통이 점점 강해질 즈음, 무통주사 덕분에 몸은 한결 편안했고 나는 그 틈에서 스르르 잠이 왔다.
아, 이래서들 무통 천국이라고 했구나.
처음 경험해 보는 무통주사에 첫째를 낳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를 생각하니, 무통만 있다면 열도 낳겠다는 짧고도 강렬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서너 시간쯤 쉬다시피 누워있을 무렵 간호사들이 분주해지기 시작했고, 곧 의사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경산모라는 이유였을까, 무통주사의 도움 덕분이었을까. 몇 번의 작은 노력 끝에 아이는 이내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나는 경력직의 위엄으로 둘째를 품에 안은 채 분만실 셀카도 몇 장 찍어 보았다.
출산 후, 간호사 선생님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일본에서는 무통 없이 아이를 낳았다고 말하자 선생님들이 놀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일본 사람들, 독하네요.”
왜 무통을 하지 않느냐고, 신기하다는 듯 묻던 표정이 아직 기억난다. 그러게요. 이 좋은걸 왜 안 할까 싶다가도, 곧 일본이라는 나라의 방식을 떠올렸다. 완전히 안전하지 않다면 쉽게 시도조차 하지 않는 태도, 오랫동안 해오던 방식을 조용히 이어가는 일본의 분위기를 떠올려보면 그들 나름의 이유도 충분히 타당하게 느껴졌다.
무통주사를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무통주사를 맞게 되면 하반신의 감각이 둔해져 진통이 오는 타이밍을 산모가 느끼기 어렵고, 그로 인해 힘을 주어야 할 순간을 놓칠 수 있으며, 그것이 산모와 아이 모두에게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출산의 고통을 엄마라면 당연히 겪어야 하는 과정, 어쩌면 인간이 통과해야 할 어떤 성스러운 고통처럼 여기는 인식도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 조리원이라는 작은 천국을 이 주동안 마음껏 누리고, 반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양가의 도움과 어린이집의 손을 빌려 아이 둘을 키웠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태어난 둘째는 이제 만 다섯살이 되었고, 마침내 두 아이 모두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그 짧은 시간 덕분에 나는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작은 호사도 누리게 되었다.
가끔 생각해 본다. 일본이든 한국이든 어느 나라의 출산이 더 낫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다시 하게 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셋째는 도저히 낳을 힘도 키울힘도 남아있지 않으며, 만약 다시 하게 된다면 그땐 정말 목숨을 담보로 내 놓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셋도 나쁘지 않겠다는 남편의 말을 살며시 흘려들으며 나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긴 여정으로부터 마침내 자유한 몸이 되었다. 오년만 더 젊었더라면 생각이 달라졌을까 싶기도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여기까지다. 여자로 태어나 임신과 수많은 고통을 동반한 그 고귀한 여정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오늘부로 조용히 폐업을 선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