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집 안에서 느낀 강진의 공포
2024년 새해 첫날, 우리가 살고있는 이시카와현에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1월 1일 오후 4시 10분. 새해를 맞아 일본 전역이 가족들과 모여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이였다. 우리도 여유로운 아침을 보내고 난 뒤, 아빠와 첫째는 세차도 할 겸 장을 보러 나갔고 아직 아가라 낮잠이 필요한 둘째는 막 잠에서 깨어 좋아하는 과일을 간식으로 먹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지진 경보가 무섭고 요란하게 울려댔고, 집은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벽이 흔들리고 유리창이 떨리며 집 전체가 배처럼 출렁거렸다.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둘째를 안고 식탁 아래로 몸을 숨겼다.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꼭 끌어 안았다.
그당시 잇코닷테라 불리는 조그만 일본의 목조주택에 살고 있었는데, 이런 집이 이 정도로 흔들릴 수 있다는 건, 미처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식탁 아래에서 우리 둘의 시간은 유난히 천천히 흘러갔고, 온몸으로 지진의 흔들림이 전해졌다. 마치 손가락이 두껍고 험상궂게 생긴 거인이 우리집을 움켜쥐고 사정없이 흔드는 것 같았다. 집은 격렬하게 출렁였다. 책장에 가지런히 꽂아두었던 책들은 힘없이 쓰러져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고, 만들고 있던 제육볶음은 그대로 떨어져 부엌바닥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 그 와중에 선반위에 있던 오븐이 반쯤 튀어나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보였다. 나는 둘째를 잠시 식탁아래 두고 재빨리 오븐을 안쪽으로 밀어 넣은 뒤, 다시 식탁아래로 돌아왔다.
분명 실제로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을 텐데, 식탁 아래에서 우리 둘의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조차 알 수 없는 몽롱한 정신으로 서둘러 뉴스를 틀어보았다.
우리가 있는 이곳은 노토반도에서 한 시간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진원지보다는 강도가 덜했겠지만, 일본 내에서도 지진이 거의 없는 이 지역에서 이렇게 큰 흔들림을 겪은 것은 처음이었다. 아마 그 순간, 이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나와 같은 두려움을 느꼈을 거라 생각했다.
시간의 속도가 더딘것 같기도, 빠른것 같기도 한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 속에 들어온 듯 시간의 흐름이 뒤틀린 상황에서 나를 더 두렵게 만든 것은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쓰나미 경보였다. 일본은 동일본 대지진 이후 쓰나미 경보가 발령되면 아나운서들이 생명을 최우선으로 강조하며 절박하고 단호한 어조로 대피를 촉구하고 있다. 과거에는 차분하고 침착한 어조로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동일본 대지진을 계기로 시민들의 행동을 한 순간이라도 더 빠르게 유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훨씬 긴박하고 격양된 말투를 사용하게 되었다. 한국말로 직역하자면 대략 이런 말들이었다.
“지금당장 대피하십시오!”
“생명을 잃고 싶지 않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즉시 대피하십시오”
”쓰나미입니다 도망가세요!“
“동일본 대지진을 기억하십시오”
노토반도 지진의 규모는 약 7.6이었다. 진도 규모가 7 이상이면 대지진으로 분류된다. 이 지진으로 5m 이상의 대형 쓰나미 경보가 발령되었고, 이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처음으로 발령된 대형 쓰나미 경보였다. 이 충격은 범위가 넓어 차로 대여섯 시간 떨어진 도쿄의 고층 빌딩에서도 진동이 느껴졌다고 했다. 뉴스에서는 계속해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한층 격양되어 들렸고,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즉시 높은 곳으로 피신해야 한다는 긴박한 메시지가 반복되었다. 높은곳이 어디더라 생각해보자.
패닉이 오려는 찰나,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쓰나미 경보가 내려졌고 우선은 대피해야 할것 같으니 여권과 아이들 마실 물 정도만 간단히 챙겨 두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무엇을 챙겨야 하는지 잘 생각나지 않았지만, 몸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여권을 찾고, 물을 가방에 넣는 사이에도 뉴스 속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점점 더 높아졌고 더 단호한 목소리로 대피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평소라면 10분이면 도착할 거리였다. 하지만 지진으로 인한 액상화 현상으로 도로 곳곳이 손상되었고, 불안에 쫓기듯 주유소로 몰려 나온 차들로 길은 금세 막혀버렸다. 그 짧은 거리를 오는데 두 배의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아빠와 아들이 집에 도착했다. 그 사이 나는 가스레인지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음식들을 치우고, 집 안 여기저기 흩어진 것들을 다시 제자리로 정리해 두었다. 마실 물과 간단한 간식을 챙겨 우리는 그렇게 대피소로 향했다.
다행히 우리가 살던 곳은 비교적 높은 지대여서 건물 피해도 쓰나미 피해도 없었다. 근처의 콘크리트 건물이 대피소로 지정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서둘러 큰 공원으로 향했다. 평소에 아이들과도 자주 가던 곳이었다. 하지만 그날의 공원은 달랐다. 대피해 온 차들이 넓은 주차장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1월 1일, 한겨울의 공기는 유난히 차가웠다. 언제까지고 아이들과 답답한 차 안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근처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다행히 난방이 되는 실내 공간에서 몇 개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쉴 수 있었다. 저녁시간이 되자 배고프다며 보채는 아이들에게 미리 챙겨 나온 간식을 나누어 주었다. 처음 보는 일본 아이들과도 자연스럽게 섞여 앉았고, 부모들은 말없이 서로의 아이패드를 내어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네 시간을 버텼다.
뉴스에서는 지진으로 인한 노토 지역의 화재 소식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잠잠해졌다 싶으면 어김없이 지진 경보가 울렸고, 그때마다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식탁 아래로 들어갔다 나왔다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저녁 시간은 이미 훌쩍 지나 있었고, 세상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우리는 그렇게 처음 만난 사람들과 조용히 인사를 나누고 밤이 되어서야 대피소를 나와 집으로 향했다.
몇 시간만에 돌아온 집은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손을 씻으려 물을 틀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처음 겪어보는 단수에 그제야 상황이 실감이 나 당황스러웠다. 씻을 물도 마실 물도 없었다. 아이들이 잠든 밤, 남편은 슈퍼와 편의점을 열 군데가 넘도록 돌아다니며 자판기에 남아 있던 물까지 마실 수 있는 음료라면 모조리 구해왔다. 설거지를 할 수 없어 접시에 일회용 비닐을 씌워 식사를 했고, 매일 밤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던 우리 가족은 이틀째가 되자 무척이나 씻고 싶어졌다.
언제 물이 다시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단수 피해를 입은 주민들을 위한 급수소로 가 마치 전쟁통의 피난민처럼 물통에 물을 받아왔다. 욕조에 물을 채워두고, 밤이 되면 그 물을 데워 끼얹듯 몸을 씻었다. 그렇게라도 하고 나니 조금은 살 것 같았다. 하지만 매일 세탁기를 돌려야만 네 식구의 삶이 원활하게 돌아가는데, 이틀째 빨래를 하지 못하자 빨랫감이 산처럼 쌓였다. 단수가 되지 않은 가까운 곳의 코인 런드리에라도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빨래를 주섬주섬 담고 있던 순간 이었다. 그때, 핸드폰으로 가벼운 진동소리를 내며 알림이 왔다. 식수로 사용하기에는 아직 부족하지만, 세탁이나 목욕 정도는 가능한 물이 공급되기 시작했으니 수도를 사용해도 된다는 안내였다.
그동안 밀렸던 빨래를 마음껏 할 수 있었고, 그날 밤에는 따뜻한 물로 샤워도 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추운 겨울에도 전기가 끊기지 않아 따뜻하게 있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없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었다.
카나자와성의 무너진 돌담은 아직 그대로이고, 내가 이곳에서 가장 사랑하는 21세기 미술관은 유리 천장이 부서져 한동안 휴관에 들어 갔었다. 도로도, 부서진 집들도 이곳은 아직도 복구중이다. 다행히 큰 피해가 없었던 우리는 비교적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와 각자의 하루를 잘 살아내고 있다. 하지만 가끔 여진이 오기전 온몸으로 진동이 먼저 느껴질 만큼 촉각은 늘 곤두서 있었고, 지나가는 헬기 소리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프로펠러의 떨림만 느껴져도 지진인가 싶어 모든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지진은 멈췄고, 복구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우리는 오늘도 밥을 짓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작은 일상을 계속해서 만들어가고 있다.
이번 노토반도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는 직접 간접 피해를 포함해 700여명에 이른다. 부상자수 역시 1,400여명에 이른다. 낡은 목조주택이 밀집해 있던 노토 지역에서는 가옥붕괴로 인한 압사와 질식사가 특히 많은것으로 파악되었고, 한겨울이라는 조건이 더해지며 대피 생활 중 저체온증과 동사로 숨진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공식 통계에 포함된 수치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간접 피해까지 생각한다면, 이 지진이 남긴 상처는 숫자로 다 담아내기에는 너무 클지도 모르겠다.
대피소에서 우리는 한국인과 일본인을 떠나 그저 아이들의 부모였고, 자연의 거대한 움직임 앞에서는 모두 작고 연약한 사람들이었다. 일본에 살아보니 그랬다. 무언가 선을 긋고 나누는 일은 대부분 내 생각 속에서 만들어낸 것이었고,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막연한 경계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날 우리는 서로를 도울 마음이 충분히 있는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살아있음에 감사했던 순간도 어느새 잊은 채, 일상에 치여 육아의 고단함 속에서 아이들을 소중히 대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지 가만히 돌아보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마지막일지도 모를 매 순간, 우리에게 허락된 모든 시간들 안에서 조금 더 친절해야 하고, 조금 더 나답게 원 없이 살아보아야 한다. 지진을 겪고나서 알게되었다. 일상은 생각보다 너무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하루에도 몇십 번, 엄마라는 이유로 나의 공간과 시간 속으로 불쑥불쑥 들어오는 아이들 앞에서 오롯한 나의 감정을 다스리기란 여전히 쉽지 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어쩌면 우리 모두는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조금 더 단단해진 우리의 일상을 오늘도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