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온도의 개인주의
우리는 흔히 일본사람들은 친절하지만 속을 알 수 없다고 말하곤 한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이곳에서 살아오며 그런 벽을 느끼는 순간들이 분명 있었다. 낯설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의 문을 쉽게 열지 못했던 시간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라는 모습은 지구 어느곳에 가든 결국 변하지 않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본질적인 형태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언어로 마음을 전하고, 눈빛으로 서로를 나누는 일.
나는 이곳에 살면서 오해가 풀리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도 여전히 내가 느끼는 것이 맞는지 스스로에게 물어가며, 의심하고, 고민하고, 또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일본 사람들은 남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지 않는다. 굳이 묻지 않아도 되는 말은 잘 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 조심스러움이 낯설었고, 때로는 차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일본에 오기 전, 내가 일본이라는 나라에 와서 아이들을 키우며 살게 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역사적인 사실들을 떠올리면 마음속에 남아 있던 것은 호감보다는 원망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앞날이란 누가 알 수 있을까. 스스로를 알지 못한 채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왔을 뿐인데, 어느새 마흔을 넘긴 지금 토끼 같은 꼬맹이 둘을 낳아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길지는 않지만 일본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던 남편은 결혼 후 함께 일본에서 살자고 했고, 나는 선뜻 그러자고 했다. 서른세 살의 나는 아직 젊었고, 무엇보다 용감했다. 그렇게 일본에 와서 산 지도 오랜 시간이 흘렀고, 올해 이곳에서의 삶도 어느덧 10년을 맞는다. 그때 내가 그렇게 쉽게 수긍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 밖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라가 달라도, 언어가 달라도 삶이라는 형태 자체는 어디서든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막연하게 믿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영국으로 건너가 파운데이션 과정을 거쳐 런던에 있는 예술대학교에서 보냈던 5년의 시간. 그 기억은 나에게 이상한 자신감처럼 남아 있었다. 어디든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았고, 낯선 곳에서도 결국은 적응하며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설령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일본이라 해도 별다른 근거 없이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였을까. 나는 겁도 없이, 그러자고 했다.
그 시절 런던으로 돌아가보면, 스무살. 다 컸다고 생각했던 나는 아직 많이 어렸다. 우울한 런던의 날씨처럼 학교생활은 버겁기만 했고, 매일이 버티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때 함께했던 친구들이 없었다면 아마 유학 생활을 끝까지 마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 나는 1년 정도 뉴몰든이라는 런던의 한인타운 근처에 살고 있었다. 인테리어 디자인을 공부하던 때라 과제는 늘 모형 제작이었고, 칼을 쥐고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어느날, 큰 커터칼로 폼보드를 자르다 그만 손가락 살을 함께 베어버렸다. 피가 철철 흘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때의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병원도, 약국도 떠올리지 못하고 무작정 근처에 있던 큰 한인슈퍼로 향했다. 어린 마음에 한국인이라면 같은 한국인인 나를 도와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혹시 여기 마데카솔이나 연고 같은 걸 파느냐고, 울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지만 눈빛엔 무서움이 역력했으리라.
그때 슈퍼 사장님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내 손을 잠시 보시더니, 아무 말 없이 약을 하나 꺼내 주시며 우선 이걸 빌려줄 테니 쓰고 다시 가져오라고 하셨다. 액체 연고였는데 바르면 살이 싸악 붙으며 코팅되듯 덮였다. 물이 닿아도 괜찮았고 일상생활을 하는 데도 불편함이 없었다. 대신 새로 바를 때마다 살이 타는 듯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 액체연고를 바르고 나서는 잘려 나간 살을 따로 봉합하지 않아도 되었고, 시간이 지나며 벌어졌던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아물었다. 약을 돌려드리러 다시 슈퍼에 갔을 때, 너무 감사했다는 말과 함께 덕분에 잘 나았다고 음료수 하나를 건네며 마음을 전했다. 문득 그 아저씨는 지금도 잘 지내고 계실까 생각이 난다.
그날 아저씨가 내게 건네준 건 약이 아니라 따뜻한 말 한마디와 친절함이었다. 다정하고 친절했던 아저씨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시기를 마음속으로 바래본다.
친절함의 대명사로 불리는 일본은 오죽할까. 편의점이든 일반 마트든 계산대 앞에 서면, 손님을 향한 공손한 태도는 마치 이곳의 기본 언어처럼 느껴진다. 혼네와 타테마에의 나라라 속마음이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겉으로 건네지는 친절 덕분에 이곳에서 살아오며 불편함을 느낀 적은 없었다.
아이들이 어릴때 두 아이를 데리고 다니다 보면, 엄마의 두 손은 언제나 짐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엄마들은 알 것이다. 특히 새벽배송도, 온라인 마트도 아직 흔하지 않은 일본에서 아이들과 장을 보는 일은 생각보다 큰 노동이다. 장을 보고 나면 카트를 끌고 주차장까지 가 아이들을 카시트에 태우고, 다시 빈 카트를 보관소에 돌려놓아야 한다.
어느날, 그 모든 과정을 혼자 해내고 있는데 지나가던 한 분이 발걸음을 멈추셨다. 초등학생 엄마쯤 되어 보이던 그분은 아이들과 씨름하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조용히 말을 건네고는 대신 카트를 가져가 주셨다.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그 다정함이 오래도록 잔잔하게 남아 있었다.
두 살 터울의 두 꼬마가 아직 아가이던 시절, 코로나가 터지며 비행편마저 끊겼고 우리는 일본에 머물러야 했다. 한국에 가고 싶었지만 한 번 해외에 나가려면 검사와 각종 서류, 그리고 2주간의 자가격리까지 감당해야 했기에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둘째를 낳고 일본으로 돌아온 뒤, 아이들과 함께 한동안은 일본에 머물며 시간을 견뎌야 했다. 일 년에 두 번쯤 찾던 한국을 가지 못하니 좋아하던 음식들도 더 그리워졌고, 아이들 덕분에 분명 행복했지만 아직 만 네 살도 되지 않은 두 아이를 돌보는 일상은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버겁기만 했다.
그 무렵 크리스마스를 맞아 일본 교회에서 작은 모임이 있었다. 스위스인 남편을 둔 일본인 마사요상도 그 자리에 와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그녀는 눈이 금세 촉촉해지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으냐고, 정말 혼자서 괜찮으냐고. 그리고는 더 말을 잇지 않은 채 나를 가만히 끌어안아 주었다. 무엇이 힘든지 묻지도 않았는데, 그저 괜찮으냐고 건네는 한마디에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았고, 대신 그 순간의 온기를 오래도록 잊지 않겠다고 마음속 깊이 새겨 두었다.
아마도 말도 통하지 않는 유럽으로, 스위스인 남편을 따라가 살아보았던 시간 때문이었을까. 타지에서 외로이 버티고 있는 엄마의 마음을, 그녀는 단번에 알아보았던 것 같다. 괜찮으냐는 그 한마디에 긴장으로 단단히 조여 있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모임이 끝날 때까지 나는 울음을 삼키며 겨우 말을 이어갔던 기억이 난다. 고마워요 마사요상.
내가 이 친절함에 대한 글을 쓰고자 했던 가장 오래된 기억은, 한 친구의 엄마에게서 시작된다. 초등학교 4학년, 방배동의 주택가에 살던 시절이었다. 학교는 집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어, 아이들 걸음으로도 20분쯤은 걸어야 했다. 어느 겨울날 아침, 집 근처에 살던 친구와 함께 학교에 가기로 약속을 했다. 그날은 유난히 추웠다. 공기가 살을 베는 듯 했고, 입김이 흩어질 때마다 겨울이 더 또렷하게 느껴지던 날이었다.
약속한 시간에 맞춰 친구 집 현관에 들어가, 친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친구의 어머니가 나를 보시더니 이대로 가면 춥겠다고 하시며, 내가 입고 있던 옷보다 더 두꺼운 점퍼를 하나 꺼내 입혀 주셨다. 목도리도 다시 한번 정성스럽게 둘러주셨다. 기억은 희미해 자세한 말은 떠오르지 않지만, 어린아이였던 나를 어떻게든 따뜻하게 해 주고 싶어 했던 그 마음만은 또렷하게 남아 있다. 목도리를 고쳐 매어 주시던 손길과 들려오던 다정하고 따뜻한 목소리는 지금까지도 내가 간직하고 있는 가장 소중한 기억중 하나다.
다행히 그 친구와는 지금까지도 연락이 닿아, 간간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아이들을 데리고 어머니, 아버지를 뵙고 오기도 했다. 어머니의 들깨삼계탕, 아이들이 무엇을 먹을지 몰라 준비해 두었다는 친구의 과자 퍼레이드까지 모녀의 친절과 배려심은 꼭 닮아 있었다. 예쁘고 다정한 마음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새삼 생각해 보면, 이렇게 선하고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건 행운 중에 행운이다.
마지막으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따뜻한 분은 고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자주 아파 입원을 반복하던 엄마의 부재로 우리 집은 늘 어딘가 불안정한 상태로 지낼 수 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입학을 하고 어쩌다 털어 놓은 사정에 담임 선생님께서는 두어 가지 밑반찬을 직접 만들어 나에게 건네주시며 밥을 꼭 잘 챙겨먹으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담임선생님 역시 워킹맘이 아니었을까. 서너 살 아이를 키우며 일을 해야 했고, 사립학교였던 만큼 수업외의 업무도 적지 않았을 텐데 그런 상황에서 담임을 맡은 학생의 집안 사정을 마음에 담아두고 손수 반찬을 만들어 건넨다는 일은, 단순한 친절 만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아마도 타인의 삶을 자기 일처럼 여길 줄 아는, 깊고 단단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문득, 지금의 세상에서도 이런 장면이 가능할까 하고 조용히 되묻게 된다.
아직도 눈에 선하다. 멸치볶음이 담겨 있던 반찬통의 뚜껑. 그것은 내가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는 감사한 기억 중 하나다. 어느덧 스무 해가 다 되어 간다. 내가 졸업한 모교는 이제 학군지로 더 유명해졌지만, 그때 그 따뜻한 마음을 지녔던 선생님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실까. 혹은 지금은 열정적인 학부모들의 기대와 요구 속에서 그런 마음마저 조심스레 숨기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지, 문득 쓸데없는 걱정을 해보게 된다.
내가 살아온 날들과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결국 사람의 마음에 오래 남는 것은 따뜻한 말 한마디와 조용한 배려였다. 어린시절 충분히 보듬어지지 못했던 순간들에 대한 억울함이 아직 마음 한켠에 남아 있어서인지 나는 더더욱 따뜻하고 다정한 것들을 간절히 바라게 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 억울함을 조금씩 내려놓고, 남아 있는 시간만큼은 친절하고 다정하게 살아가고 싶다고, 오늘도 스스로에게 조용히 다짐해 본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일본은 한국처럼 서로의 삶에 깊이 관여하는 일은 드물다. 친절함 속에서도 한국과는 다른, 어느 정도의 적당한 거리가 존재한다. 그 적당한 거리 안에는 서로의 삶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고, 존중하며 지켜봐 주는 배려가 담겨 있다. 처음에는 그 차분하고 차가운 분위기가 낯설었고, 때로는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조금 더 나의 삶에 관여해 주기를 바랐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거리감이 편안해졌고, 나 역시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조용한 배려와 알맞은 온도를 조금씩 배워가며 살아가고 있다.
차가운 개인주의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안에는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배려가 녹아 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따뜻한 거리의 예의라고 부르고 싶다. 그 사이의 거리를 잘 조율하며 더 많이 친절하고, 더 많이 사랑하며 살아가려 한다. 어쩌면 이상주의자의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결국 사랑은 우리가 많은 것을 견디게 하고 또 이겨내게 하는 힘이니까. 언젠가 아이에게도 이 이야기를 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 세상이 두려워질 때마다, 사람의 손과 마음이 우리를 다시 살아가게 한다는 것을.